그 길은 느리고도 질겼다. 길은 산을 피하면서 산으로 달려들었고, 산을 피하면서 산으로 들러붙었다. 그리고 그 길은 산 속에 점점이 박힌 산간 마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챙겨서 가는 어진 길이었다. 그 길은 멀리 굽이치며 돌아갔으나 어떤 마을도 건너뛰거나 질러가지 않았다.

- 22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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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자전거여행. 52의 그가 자전거를 타고 전국 방방곡을 여행하며 쓴 글이다.

나이도 지긋하신 분(?)이 두 바퀴에 몸을 싣고 고군분투하며 높고 낮은 길들을 허덕허덕 넘어가는 이야기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굽이 굽이 굽은 길들을 두 발 굴러 하나 하나 넘어가고, 그렇게 제 발로 넘어가며 보이는 것들에서 삶과 죽음, 자연과 인간, 긴 시간의 역사와 찰나의  순간을 헤아리며 나아간다.

 그는 무기도 되고 악기도 되는 대나무 숲에서 인간의 거친 삶과 자연의 따스한 위안을 찾아내고, 도산서원에서 퇴계의 마음빛을 찾아내며, 망월동에서 역사의 거친 질곡 속에서 피어난 사랑을 찾고, 진도에서 충무공의 삶을 관통하는 순결한 칼의 노래를 듣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자전거 여행을 읽으며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새삼 되새겼다. 그는 길에서 강에서 산에서 숲에서 그리고 그 모든 곳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의 비루하고 고귀한 한자락을 들여다 본다. 그래서 그가 돌아다니며 들여다 본 것은 이 나라 자연풍광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역사와 문화의 깊숙한 골짜기들이었다.

 

 여행은 천천히 느리게 할 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어디든 빨리 갔다 빨리 돌아오는 게 더 좋게 평가받는 세상이지만 그저 빨리 지나가 버리기만 하면 제대로 들여다 보고 제대로 느끼고 생각할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처럼 두 바퀴를 제 발로 굴려 다니며 길을 온 몸에 새기는 여행도 좋고 한발 한벌 걸어서 길을 제 것으로 만들어도 좋고 말이다. 느리게 가면서 더 많이 더 깊게 보고 느끼는 여행을 올 봄엔 계획해 봐야 겠다.

 

 내게 김훈은 근대 이전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나 남성성을 보여주는 작가다. 그러니 그런 그가 역사소설을 쓰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남자들이 그와 그의 문장 그의 문학을 좋아하는 것은 대로 근대 이전의 남성의 삶과 권위 지위에 대한 향수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가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런 권위와 동시에 비난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그의 태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김훈 아저씨는 귀여운 마초라고 말하는 여자애까지 있고 보면 뭐...) 시대의 물결이 어찌되든 나는 내가 지킬 것을 지키며 나아가겠다는 듯이 보이는 그의 길은 마치 그의 이 <자전거 여행>처럼 빡빡하고 힘들지만 동시에 재미와 맛이 함께 하는 길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어쩐지 가벼운 느낌이 드는 번역된 책들만 연달아 읽게 될 때 한국어문장의 맛이 그립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이번에 오랜만에 한국어 문장의 맛을 제대로 보았다는 느낌이다. 내용을 쫓아가면서 허겁지겁 읽지 않고 며칠에 두고 찬찬히 단어를 꼭꼭 씹어가며 맛나게 읽었다.

깊고 진한 맛이 나는 그런 책<자전거 여행>이었다.

- 다락방서 허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