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잊어버리고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일본 문화가 개방이 되고나서(물론 그 전에도 솔솔찮게 영상물이나 출판물이 들어오긴 했지만)
봇물처럼 밀려들어오는 영상물과 출판물들을 또래 친구들이 걸신들린 듯 탐할 때
나는 "일본 애들 정서 맘에 안 들어"하면서 한 번에 끊어낸 적이 있었다.
시오노 나나미 부류의 글들은 너무 가벼웠고, 일본의 근대 소설들의 정서는 한마디로 '우중충'했다
하루키는 좋아했지만 이유는 일본 냄새가 안 나서였다.
20대 초반의 일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으면서 그 우중충함이 다시 되살아났다.
역시나 등장인물들에 대해서는 "짜증"이 났지만 모든 게 명쾌해야 하는 20대의 시선이 거둬졌기 때문인지그 "짜증나는" 인간들 사이의 연민과 이해가 생겨난 게 사실이다.
아~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나쓰메 소세키는 이 "짜증나는" 인간들의 이야기에 -마음-이라는 제목을 붙여놨다.
가장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마음을 선두로 내세우고 그는 일반적이지 않은 세 사람의 관계를 제시한다.
주인공 나에게서 선생님에게로의 마음,
선생님이 k에 대한 마음,
k가 내 처에 대한 마음(당시는 사모님의 딸)
그리고 아버지가 나에게로 가는 마음.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상대와 소통하는 말하기의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모두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제각각의 생각을 매우 일방적으로 진행시킬 뿐이다.
소설의 진행이 일인칭으로 진행되는 것도 일방적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다들 그 이유는 있다.
주인공 나는 선생님을 존경한다는 이유로 말 그대로 선생님의 환경에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선생님은 젊은 시절의 상처로 인해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k는 '정진'이라는 금욕적인 인생의 목표가 사모님의 딸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흔들려 혼란스러웠을 것이며,(아마 본인 스스로도 인정하기 힘들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주인공의 아버지(와 어머니 포함)는 나에 대해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이해와 체면치레를 요구한다.
그런데 각각의 사정이 있는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표현의 부재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두 사람은 결국 죽음을 댓가로 받아들인다.
인과를 바꿔서 생각해보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죽음을 앞둔 또는 각오한 상황에서나 가능한 듯 보인다.

아주 섬세하고 여려서 다치기 쉬운, 마치 외부 공기에 노출되는 순간 산화되어 썪어버릴 것 같은
개인적이고 여린, 어떤 것도 혼합되지 않은, 매우 순수한 마음. 그렇기에 위험한 마음.
나쓰메 소세키를 일본의 세익스피어라 칭하는 이유는 아마도 추상적이고 섬세한 인간의 심정을 극도의 감수성으로 표현해내는 뛰어난 표현 능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가 만들어 낸 인간들은 자신의 정서를 숨기고 숨겨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지만,
그는 말하지 않듯 조용조용 다 얘기해 주는 친절한 작가다.

결과는 충격적이다.
선생님의 죽음에 대한 설명이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닌 나의 목소리로 얘기가 되었다면 충격이 덜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자신이 겪었던 상처와 자신이 상처를 주었다고 믿는 k에 대한 얘기를 마치 고해 성사하듯이 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유로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선생님은 k에 대한 여죄를 씻은 듯하다. 이런 방법도 얼마나 이기적이란 말이냐..

선생님은 자신의 마음을 나에게 보여준 듯하나 이 역시 나에겐 일방적인 통보였으며, 선생님으로서는 끝까지 자신이 정해 놓은 삶의 룰(신뢰 할 수 없는 인간, 다른 이에게 휘둘리지 않는 견고한 마음)을 내게 확인시켜 준 결과로 보인다.

살다보면 참으로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밖으로 드러내면 의외로 별게 아닌 경우가 많다.
반대로 밖으로 드러냈을 때 별게 아닌 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고 꽁꽁 숨겨두는 경우도 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그들의 생각으로는 매우 큰 상처와 고민들이었겠으나 결국 그것들을 풀어놓지 않음으로써 가벼워질 수 있는 것들을 무겁게, 더 심각하게 키워놓지 않았나 싶다. 결국 그것들이 자신을 고립시켰고 말이다. 당시 일본의 근대 사상으로는 순수한 자아의 고립은 매우 우아한 삶의 방식으로 이해됐는 듯 싶기도 하다.

작년 초 한 교수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 있다.
순수한 자아는 세상에 상처를 많이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화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세속적일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의 세 인물들에게 특히 젊은 날 죽어버린 k에게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