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를 아버지로 둔다는 것, 그 상황은 처해보지 못하면 알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작품이 팔리지 않아 생활이 어려운 예술가라니. 평생을 자유롭게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산 아버지의 밑에서 자라는 것은, 거기다가 자신은 아버지의 길과는 털끝의 인연조차도 없다면 그 삶은 지옥이다. 아버지의 예술적 영혼을 펼치기 위해 뒤늦게 시간의 톱니바퀴에 올라탄 자식은 본인 고유의 삶을 포기한다. 물론 아버지는 변명한다.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아냐고, 정말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길을 포기할까 말까 항상 고민한다고, 하지만 이 길을 가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명이라고. 그런데 이 몇 명의 사명감 투철한 아버지들 때문에 별 특별한 사명감 없이 세상에 태어난 평범한 자식들은 제 삶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가족의 생활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아버지의 할 일 중 의무만을 물려받았다고나 할까. 참 불합리하다.
박수근은 아마 그런 아버지였을 거 같다. 그 사람이 성취했다는 예술적인 달성은 난 잘 모르겠다. 대단하구나 싶기는 하지만 워낙 그런 쪽엔 소양이고 뭐고 없어서 그냥 책에서 교과서에서 대단하다고 하니 대단한 거구나 싶을 뿐이다. 그래서 막상 이 소설을 읽었을 땐 다만 내가 생활전선에 나가 돈을 버는 생활인으로써 아버지 박수근과 아들 성남이만 와 닿았다. 마음이 아팠다.
우리 아버지는 참 한량이셨다. 평생을 본인 좋은 일만 하셨다. 집에는 평생 사회생활이라곤 해보지 못한 엄마와 동생들 셋이 있었고 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직업을 가졌다. 그저 우리 가족들끼리 소박하게 생활만 하기 위해서라면 고졸의 초년생이 받는 봉급도 충분했겠지만 자라는 동안 생활비가 없던 까닭에 주변에서 얻어다 쓴 빚 조금과-엄마는 참 억척스럽게 아끼셨다- 아버지가 일을 벌이신다고 사방에서 끌어 쓴, 어찌 갚을까 막막하기만 한 어마어마한 빚들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여전히 허덕여야 했다. 그래서 난 그 위대한 박수근을 비하하는 성남이의 심정이 조금도 심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당연했다. 거대한 나무 밑에서는 조그만 풀뿌리조차 자라지 못한다는 말이 그렇게 잔인하게 와 닿을 수가 없었다. 본인은 그렇게 마음껏 날개를 치면서 주변에는 받은 만큼, 아니 아주 조금도 돌려주지 않는다니. 어쩌면 그렇게 이기적이야만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건가 싶어 함께 욕을 했다. 암, 당연하지. 욕먹어도 싸지. 그럴 거면 낳지나 말지, 낳아놓고 저렇게 무책임하게 자기 일만 할 수가 있나. 나는 성남의 말에 하나하나 힘주어 동의했다. 그 아이의 속말에서 나를 봤으니까.
요즘 아버지는 집에 계신다. 글을 쓴답시고 함께 협회를 만듭네, 출판사를 차립네 하던 그 많던 친구 분들도 요즘엔 한 분도 안 보이신다. 위성방송으로 바둑 열심히 보시고 동네 기원에 다니시며 그동안은 격 떨어진다고 거들떠도 안 보던 동네 친구 분들이랑 점심 내기 바둑도 두신다. 방석 하나 깔고 오도카니 앉아서 바둑 방송을 보고 계신 뒷모습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안됐기도 하다.
에그~ 아버지, 박수근은 그래도 죽어서 40억도 넘게 그림이 팔렸대요. 요즘 세상엔 돈이 인정받는 기준이잖아요. 근데 아버지는 뭐유. 돈 떨어졌다고 젊어 그렇게 몰려다니던 친구들도 떠나가고. 그렇다고 그렇게 오만 폼 잡아가며 죽도록 쓴 글을 누가 알아주길 하나. 쯧.
박수근 화가의 부인인 김옥순 여사의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천생연분이란 저런 건가. 예술가 부인이란 저래야 하나. 그렇다면 우리 엄마랑 아버지는 인연이 아니었을 텐데, 우리 엄마는 힘들어 툭하면 눈물바다였는데. 엄마는 예술가 아내 될 재목이 아니었고 난 그 자식 될 능력이 없었는데 하필이면 우리가 가족이 되서 아버지는 이해도 못 받고 결국 꿈을 못 이루신 건가 싶다가도, 어쩌다 반찬이 부실하다고 조금 드시곤 숟가락을 내려놓는 시위라도 하시면 거들떠도 안보는 건 물론이요 불쑥은 마주 대들고도 싶다. 이거라도 먹고 살려고 내가 포기한 게 뭔 줄 아냐고, 마주서서 소리라도 치고 싶다. 하지만, 그래도 그럴 수 없는 건 가족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 가족들을 끔찍이 사랑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비록 그 사랑이 눈에 보이는 현실의 알기 쉬운 형태로 나타나진 않았지만 말이다. 허구한 날 헛꿈을 쫒아 다니느라 돈에 쪼들리던 아버지가 언젠가 주머니에 푼돈이 생기자 엄마와 나와 동생들을 줄줄이 끌고 포장마차에 가서 국수를 사주신 적이 있다. 그땐 너무 싫고 화가 났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아프다. 그것밖에 못 사주는 그 마음은 참 어땠을까.
요즘 기운 없는 아버지를 보면 마침 이번 달이 세금환급이 있는 달이라 가욋돈이 조금 생기니 조만간 친구 분들과 연락해 식사 자리라도 한 번 하시라고 용돈이라도 좀 집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땐 그토록 보기 싫던 친구 분들이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고 계실까? 그렇게 패기만만하게 어깨를 떨치고 다니시던 친구 분들은 모두 안녕하신가, 또 다들 집에는 무사히 들어들 가셨는지 때때로 궁금하다. 나도 이제 불혹, 인생이 무 자르듯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알만큼 나이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