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인간이 만들어낸 기괴한 모양의 대량살상 시스템이다. 누구도 손 댈수 없는 망가진 시스템, 스스로 진화하면서 통제가 불가능한 수퍼컴퓨터처럼 거대하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찾아 볼 수 없다. 그 앞에 생명의 존엄은 가치를 묵살 당하고 만다. 잔혹한 전쟁은 지나간 흔적 또한 돌이킬 수 없는 황폐함을 던진다. 일본의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도륙되어 지고, 유린 되어졌지만 어느 덧 흘러 간 과거사로 묻혀 가고 있다. 잊혀진 것들은 또 다시 흉물스런 모습을 드러낼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과거로  잊고 만다면 말이다. 여기 미처 알지도 못했던 또 하나의 끔찍한 역사를 파헤친 책이 있다. 마루타, 731부대, 위안부 할머니들 뒤로 묻힐 뻔한 소록도의 숨겨진 역사가 드러난다. 백동호 작가의 <보리밭에 달 뜨면>을 통해서이다.

백동호 작가..누구신가? 싶다면, 한 때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반도를 강타했던 영화 ’실미도’를 기억해보자. 바로 그 ’실미도’의 원작자이다. 그의 폭풍같은 대작은 남다른 이력에 바탕한다. 문교부(학교)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법무부(교도소)에서 3천 권이 넘는 책을 독파한 것에서 기인한다.  그가 직접 경험했던 수감생활과 수천 권에 달하는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이 집대성 되어 있는 그의 작품들은 실감나는 어휘 구사로 단번에 소설속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런데 사실 그 말에서는 어쩐지 곰팡이 냄새가 심하게 난다. 강한 이기심에 자기합리화가 더해지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백동호식 해석이다.


나환자 한상혁이 살인을 저지른다. 더이상 삶을 이어나갈 의욕도 없는 그가 들려주는 소록도에서 참상이 시작된다. "배추벌레는 흉측하기 짝이 없는 벌레일 뿐이고 인간은 소중하며 우월한 존재" , 대한민국에서도 나환자는 인간배추벌레나 한 가지로 비유된다. 일본에 의해 자행된 인간생체실험의 잔혹성에 앞서 우리 동포에게서조차 외면 당해야 했던 인간의 비관적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아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 밤새 울었다... (책본문 中)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법했던 이야기. 문둥병자가 아기를 잡아 먹는다는 와전된 구설수가 떠돌고 급기야는 서정적 반향을 일으킨 서정주의 시와 지면에 기사화 되면서, 점차 사실 아닌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마녀사냥의 시작이었고, 전쟁을 빌미 삼아, 주변에 팽배했던 나환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수많은 나환자들을 소록도로 유배했다. 그곳에서 일본인들은 아무런 거리낌과 간섭없이 매질과 고문과 생체실험을 강행했다. 1만 여 명...눈도 감지 못한 영혼들이 소록도의 하늘을 맴돌고 있는것이다.  작가 백동호가 10여 년의 세월동안 파헤친 소록도의 역사는 많은 자료를 통해 지난 왜곡을 재조명 하고 있다.  한 사람의 분개가 이처럼 높고, 우리의 기억이 다하지 않았는데 왜 진실은 규명 되어지지 못하는걸까?   어차피 일본은 뭉뚱거려 지난 과거에 대한 보상을 했고, 사죄의 시늉을 함으로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주었기에 발뺌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왜?   당시에 암묵적 동의를 보낸 우리 정부가 스스로 치부를 드러낼 수 없어서는 아닐런지 조심스레 되묻고 싶다.  

’스미마생..’ 그건 지하철에서 남의 발을 밟았을적에나 쓰는 일본식 입발린 미안함이다. 또 그 얘기야? 라며 마치 용서를 구걸하는듯 우리를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는 도무지 두고 봐줄 수가 없다. 그런데 더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의 일부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와 비슷한 생각들..’이제 그만하지, 다 지나간 얘긴데..’ 두렵다. 끔찍하고 추한 과거라고 잊으려 하는게 두렵다. 그들도 잊고, 우리도 잊어버린 그 시간이 되면, 흉물스런 모습의 또 다른 역사는 되새김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바로 알자, 그리고 기억하자. 용서할 것이 있다면, 그 뒤에 하는것이 옳지 않겠는가.  비슷한 역사를 가진 유태인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나치 수용소에서 한 줌 재로 사라졌던 과거를 아들에게, 또 그 아들에게 밤마다 이야기로 들려준다고 한다. 그때 죽음의 감옥에서 살아 나온사람들의 피빛 물건들을 이야기와 함께 물려주고 또 물려준다고 한다. 지금 세계 수뇌부에서 보이지 않는 막강한 힘을 비축한 유태인..그들을 지탱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주시해야할 것이다. ’탈무드’에서 가르치는 교훈만이 그들의 전부는 아니기때문이다.  

안락사나 존엄사만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에 대한 진지한 논쟁으로 요사이 화두가 되고 있다. 호스를 연결해서라도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나 고통없는 죽음을 맞이하도록 돕는 것, 모두가 생명의 소중함과 가치를 중시 한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할 수만 있다면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욕망일진데 이도 저도 선택할 수 없었던.. 단지 나환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통한속에 눈을 감지 못했던 소록도의 수많은 영령들에게 위로를 보내며, 그들의 외침과 내민 손을 뿌리쳤던 과거를 딛고 오늘에 서 있는 사람으로 고개 숙여 사죄하며, 이 책을 읽음으로 그 네들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