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에 어마어마했던 사내의 이야기다. 팔뚝을 걷어부치면 용 서너 마리는 꿈틀댈 것 같은 사내의 영웅담을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3류도 못 돼 본 ’나’ 의 ’일그러진 영웅’ 에 관한 추억이다.  마사에게로 가는 버스안에서, 아주 싱거운 불평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이제 막 굿을 시작하는 무당이 신령들의 이름을 불러들이는 것처럼 애꿎다. 죽은 이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어 극락으로 보내는 ’씻김굿’ 이 떠오른다. 원색적인 천들이 바람에 놀아나는 아래 모여 든 사람들, 죽은 자의 가족은 손바닥을 연신 돌리며 기원한다.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건지, 무당의 굿이 탈없이 끝나기를 비는건지 알아차리기 힘든 표정이다.  구경꾼들, 그러니까  난데없는 무당의 손가락이 자신에게만 오지 않기를 바라는 지극히 겸손한 ’소망’ 을 가진 자들의 표정은 더욱 심오하다. 희극적 슬픔을 과장되게 드러내고 있다. 마사오에 대한 지난 시간들이, 무당의 손에서 요란하게 울어대는 방울소리처럼 뿌려진다.   


마사오에 관한 불패 신화는 거짓이다. 주먹 세계에서 흔히 있는 ’16 대 1’ ...에 버금가는 유수한 신화들. 나는 그것을 일찌기 알면서도 ’발설’ 하지 않음으로, 남들처럼 가지고 싶었던 영웅을 갖는다. 영웅은 그에게 무슨 의미었을까. 콩고물 하나 제대로 건지지 못하면서 마사오의 광신자가 되어버린 그의 경외는 얼어죽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마사오에 대한 충성심이 남 달랐다고도 할 수도 없다. ’나’ 에게 마사오는 흠모며 동경인 동시에 연민이다. ’나’ 는 광자와 세희를 대비시키며 각자에게 담긴 감정을 마사오에게 투과시킨다. "사람의 영혼을 복종하게 하는 그윽한 눈길" 의 광자를 통해서는 마사오에게 뻗어진 뿌리를 의식한다. 완력으로 안되는 게 마음이다. 거세게 흔들어댄다고 나무가 뿌리까지 출렁이지 않듯, 뿌리로부터 간간하게 흡수된 연민이 관을 타고 온 몸을 휘감는다. 그러나 마사오를 향한 ’광자’ 적 애정은 뿌리 잔털처럼, 소상하고 심란하게 에로틱하다. 그런가하면 ’세희’ 적 사랑은 어떤가. 먼 발치에서 곁눈질하는 흠모며 동경이다. 완전히 자기 것일 수 없는 것에 대한 질투다. 잎사귀들이 자신의 양껏만 빨아들이고 나머지는 속절없이 버려야하는 햇살의 크기만큼 잉여를 감수한 사랑이다. ’나’ 는 그렇게 ’왕’ 이 아닌 한 사람에게로 향한 흠모와 연민을 먼지처럼 묻히고 있다. 그리고 천천히 비에 먼지를 털어내고 씻기우 듯 그것들을 벗겨내는 작업을 연속한다.  


왕좌를 향해 파란만장한 인생을 찌질하게 살아 내는 재천. 그리고 또 다른 재천들. 재천에 대한 ’나’ 의 생각은 일관되게  냉소적이다. 허무를 쫓는 인간 군상들에 대한 연민을 투덜거리듯 뱉어낸다. 그들에게서 감춰진 마사오의 시간들을 드러내면서 역시나 같은 냉소를 보낸다. 타고난 인간의 탐욕적인 이기심을 질타한다.  그러나 "과장된 울음소리" 에 녹아있는 자기연민마저 부정하지는 않음으로써, 구체적인 변명의 여지를 남겨준다. ("사람이 앞일을 어떻게 알겠나.")  때론 순정적이며, 때론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그러나 여전히 극성스런 인간의 변덕과 아집과 집착을 묵묵히 견뎌준다. 여기서 ’나’ 는 객관적이며 타자로 돌아 선 ’마사오’ 가 되어있다. 그래서 이해하려 애쓴다. 침잠하는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다 버리고 가야하는 순간에, 분노까지 내려놓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천과, 또 다른 재천을 이해하고 용서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옭아맨 뜻하지 않았던 시간들의 구속을 떨쳐내려는 것이다.     



왕께서 길 떠나신다.
마사오가 나가신다. 서쪽으로 나가신다.
고개를 돌리신다.
손을 들어 보이신다.
왕께서 웃으신다.
왕께서 웃음을 머금고 멀어져가신다.
어쩌나, 점점 작아지는데.
점으로 남으시네. 남으셨다.
점이 사라진다.
어둠이 온다.
한동안 매미 소리만 세상의 귓속을 가득 채운다. (328쪽)


 "왕께서 머금은 웃음" 은 황망하고 쓸쓸하고 허탈하다. "점이 사라지" 고 난 자리에 허무한 공허만 가득하다.  굿이 끝나간다. 씻김굿이 끝나가는 마당에 변절적 넋두리가 튀어나온다. "망원경만이라도 밝고 어두운 세상 모두에 공평하게 설치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 대뜸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한다. "어둠이" 오자 정작 ’내’ 가 자기연민의 늪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세상은 다시 "매미 소리" 처럼 시끄럽고 변덕스럽고 요란하다.  씻김굿은 어느 새, 살아있는 자들의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산 자들의 ’부정’ 을 다 씻어주고 여염(閭閻)을 두루 살펴주십사 축원한다. 우산을 받쳐 든 밑자리에만 겨우 남겨진 처량한 공평 무사가 아니길 바라는 ’그저’ 의 축원이다.  성석제 작가의 세련되지 못하고, 멋드러지지도 않고, 치밀하지 않은 문장들...그래서 구닥다리 같이 평범하기까지 한, 갖추지 않은 듯 털털한, 뭉근하게 퍼져있는 문장들, 그것 때문에 굿판이 걸죽하게 신명난다. 무당만의 독특한 음조 때문에 구설(口舌)까지 익살맞다.  비오는 날, 스님 염불하 듯 타닥타닥한 박자를 탄다.  묵은지에 듬성듬성 썰어놓은 돼지수육 척, 얹어서 막걸리를 걸쳐야만 체감되는 살아있음에,  거나하고 질펀한 삶에, 살아있는 자들에 대한 융숭한 씻김굿은 끝났다. 이제야 살아있는 자들은 안녕히 ’나’ 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왕을찾아서, 성석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