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면서, 밥벌이도 된다면 세상 살 맛 나겠지만 흔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세상 사는 맛이 조금 시큼하긴하다. 가끔은 소설같은 상상을 하기도 하는데, 아무도 ’나’ 를 모르는 곳에 가서 다른 ’나’ 로 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한 때, 배우처럼 멋진 인생은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른 사람의 삶을 잠시라도 들락거릴 수 있겠다는 매력 때문에서였다. 잠시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도저도 안되는 판국에 [빅 픽처] 같은 소설을 만나게 된것은 일말의 카타르시스, 위험한 행운같은 거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밤이 좋다. 음침하고 어두운 밤, 말고 아늑하고 조용하게 그림자가 쉴 수 있는 그런 밤이다. 그림자...나는 그것의 현상이다. 나는 그림자라는 필름이 내놓은 한 장의 사진들의 연속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확히는 내가 현상화되지 않는 그런 밤이 무척이나 좋다. [빅 픽처] , 낮에 시작한 읽기를 미루고 밤이 되어서야 계속했다. 제목 때문은 아니었고 게리의 죽음, 그 순간부터 밤을 생각했다. ’암실’ 같은 밤에 현상(現像)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아내의 남자에게 호의를 보이는 미친 놈일 수 없다. 벤은.    
멀쩡한 남자가 미쳐가는 과정을 본다. 하긴 딱히 미쳐간다고 볼 수는 없다. 원하던 바는 아니지만 어찌됐던 다른 인생으로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니까말이다. 그런데 다른 인생으로의 길이, 자의적이고 계획적이지 못하다는 건 역시나 불행할 수밖에 없나보다. 그 불행의 늪을 헤매는 그에게...’얼른 도망가. 그렇지만 침착하고 완벽하게.’ 라고  부추기는 내 목소리가 은밀하게 떨린다.  게리는 죽어도 싸, 가 아니다. 벤의 삶이 처음부터 그 답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삶으로의 도망에 동조하고 싶었다. 재능없어 보이는 사진작가의 길을 걸으며 지지리 궁상을 떨다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 때보다 더 아릿한 연민이 파고든 때문인데,  아버지의 ’바램’ 에 밀려 세상과 타협하는, 거짓 투성이의 삶을 사는 그가 애처로웠다. 너무나 비소설적 관점에 얽매이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불필요하고 달갑지 않은 몰입일지라도 떠밀리는 감정은 그랬다. 그만큼 소설적 긴장감이 실체적이었다. 손에 땀을 쥐게하는, 그냥 땀이 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땀을 쥐게 만든다. 



나는 계곡을 바라다보며 내가
농담 같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에 젖어들곤 한다. -485

농담 같은 세상 속에서, 정말이지 농담 같은 인생을 살게 된 남자.
어디 그가 사는 세상만 그럴까. 차라리 농담 같이 가볍게 눈 흘기며 살 수나 있으면 좋겠다, 싶은 세상이다. 하지만 세상이  농담을 던져도  우리는 진지해지기만 한다. 치정살인, 도망, 은둔...딱, 3류 소설 줄거리같은 이 이야기에도 ’진지’ 들고 고민하는 나를 보니 더 할말이 없다. 아무튼  벤에게 동조할 수 없는 비겁을 보는 게 고달프다. "스스로 허락한 인생을 말없이 증오"한 , 그런 엄마와 같은 인생을 사는, 아니 그런 인생을 산다고 느끼는 베스를 돌아봤어야했다. 벤, 자신의 인생이 흔들리는 카메라와 같았기에 베스의 사진이 매번 흐릿하고 촛점없는 것이었을까. 단지 무덤의 핑계에 불과했을까.  이런 장르의 - 딱 꼬집어 구분짓기는 어렵지만 나름대로 추리 스릴러물 쯤이라고 여기는- 소설에서 이런 고민까지 떠안는다는 게 어줍잖기는 하지만, 더글라스 케네디...그렇게 만든다. 


사진이란 뭘까. 그냥 순간이며 정체다. 바라보기에 따라서는 근사하기도 하지만, 나더러 그 속으로 들어가라면 ’노 땡큐’ 다. 살아있는 것들은 다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사진 속 인물이나 동물이 사진 밖으로 나오고 싶어하는 건, 영화나 책으로 봤어도 반대의 경우는...기억에 없다. 역동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짐짓이나마 알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벤의 새로운 삶에 건투를 빌면서도 유쾌할 수 없는 박수에 그치게 되는 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진이 되어버린, 그래서 움직일 수 없는 가슴으로 사는  남자, 떠나고 싶은 충동을, 두 번 죽기전으로 되돌리려는, 불안정을 사는 벤을...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으로는 두 번째이다. 먼저 읽었던 [위험한 관계] 도 그렇고 이번 소설도, 발단은 부부다. 딱 부부간에만 알 수 있을 것 같은 고도화된 밀도가, 너무나 사실적이다. 단지, [위험한 관계] 는 아내들에게 바치는, [빅 픽처] 는 남편들에게 바치는, 동조성 위로소설, 상대방을 향한 경종소설이라고나 할까.  사진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사진은, 여자와 남자가 얼굴에 핏대를 세우고 마주하지 않는다. 천진하게 웃고 있는 어린 아이의 사진이 담긴 액자 유리가 깨어져 나뒹구는... 한 장의 사진으로 함축된다. 그래서 흥미진진하고 긴박하기까지한 소설을 잘. 읽고나서 까탈을 부리게 되는가보다. 한 남자의 인생이 뒤바뀌는 과정이, 칼로 물 베는 싸움에서 시작해 아이의 눈물을 보게 만드는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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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