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남자, 애초부터 위험한 관계다. 그렇다고 시작도 말라는 그런 얘기는 아니고, 그냥 알고나 시작하라는 얘기다. ’님’ 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 이 된다고 말 한 사람, 인생을 알아도 제대로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런 인류애적 명언에도 불구하고 콩꺼풀의 힘은 무한한지라 졸을음 몰고 오는 눈꺼풀 다음으로 버텨내기 힘들다. 초자연적이란 말씀이다. 꺼풀이든 커플이든 간에. 큐피트가 일일이 나대며 사랑의 화살을 쏘아대지 않아도 ’니가 옆구리 쿡쿡 찔렀지’ 라며 잘도 사랑에 빠진다. 이렇게 잘도 사랑에 빠진 여자가  ’깊은 늪’ 으로 더욱 깊숙히 빠지게 되는...이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치밀하고 집요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로맨스, 매디컬 드라마, 그리고 불구경보다 눈을 떼기 힘들다는 싸움 - 머리 끄댕이를 움켜쥐고 싸우는 것보다 더 스릴 넘치는 법정싸움- 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는데, 한 마디로 있을 건 다 있다. 



매력적인 남자와 첫눈에 사랑에 빠지다... 
,에서 그놈의 ’매력’ 이 문제다. 작가가 ’매력’ 이란 단어로 누군가를 설명하며 시작한다는 것은 그 인물을 조심하라고 머리위에 붙인 빨간 스티커란 말씀.  하지만 이 빨간 스티커가 주인공에 눈에 안 보인다는 게 더 큰 문제지만 말이다. 토니와 샐리가 만났을 때, 극적이다. 기자라는 직업 때문인지 처음부터 긴장감 넘치게 빨려 들어간다. 어려울 때 진짜 친구를 안다고 하는데 하물며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민첩하고 세련되게 구해준다면, 전적인 신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여기서 바로 사랑으로 이어지자면 필연적인 어떤 이유나 상황이 있어야하는데, 샐리는 자신의 직업을 공감하며 이해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토니에게 꽂힌다. 그리고 말이 통한다는 건데...쉬운 듯, 당연한 듯하지만 말이 통한다는 게 그리 녹록하게 현실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특히 남자와 여자는. 오죽하면 화성여자, 금성남자라 했을까. 남녀 사이에서  말이 통한다는 건, 언어적 교류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상태에서 비롯한 유대, 랄까. 그래서 결혼을 하고 남자가 남편으로, 여자가 아내로 상태화했을 때 이전 상태에서의 유대가 깨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불행을 예감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고 간결한 사람이 취하는 행동에서는 더 읽기 어려운 예감이다. 남편에게서 낯선 여자의 향기가 느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이 문장, 뭔가 문제있지 않나? 왜 낯선 여자의 향기라고 표현할까, 낯선 여자의 냄새지. 향기란 의도적 호의를 담은 감각인데 말이다. 그렇다치고, 낯선 여자의 냄새가 안 난다고 남편을 다 알 것 같냐면 그것도 딱히 아니다.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 그러면서도 전혀 모르는 사람" 이 남편 아니던가. 전혀 모르는 사람하고 한 평생 무엇으로 사는가? 물론 사랑이라고 말했으면 좋겠지만, 사랑만으로의 부부관계는 유효기간이 너무 짧다. 믿으며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들이 아닐까. 그래서 고리타분하긴하지만, 믿음이 깨어졌을 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관계로 치닫게 되는 것인지도.    




"나는 아주 오랫동안 경험하지 않은 낯선 감정과 맞닥뜨렸다.
  그건 바로 두려움이었다."

결혼은 현실이고, 경이로운 생명 탄생뒤에 오는 것도 현실이다. 흡사, 기도중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갑자기  똥을 싸고 울어대는 상황처럼 당혹스럽다고나 할까.  그보다는 생경한 감정, 두려움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더글라스 케네디가 남자임에도 어쩌면 그렇게 섬세한 여성적 고충을 그려내는지 놀랍다. 젖이 불어서 유방이 붓고 단단해지고 아프고 그런 차원이 아니라 그 아픔의 구체적인 행위, 즉 저도 모르게 젖을 문 아이를 밀쳐낸다거나 유축할 때 손의 위치, 자세, 상황을 바들바들 손에 잡힐 듯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는 적합한 단어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 수면 테러리스트’ 에 대한 표현에서, 머리 흔들어대는 몽키인형처럼 고개가  정신없이 끄덕여졌다.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임무를 완수했으면 육아는 공동 책임하에 이루어져야함에도 철저한 분업화 정신과  완전한 독립을 권장하는 남자들의 집행자, 토니를 보며 분개하지 않았다면 솔직히 거짓말이다. 소설인 걸 뻔히 알면서도 토니를 책속에서 끄집어내 한 대 치고 싶은 정도. 드라마 폐인으로 이끄는 초강수는 선과 악의 극명한 대립이다. 여기서 악이 지독하면 할수록, 더 몰입되고 흥분된다. 이 소설에선 배신남 토니와 가여운 여자 샐리가 대치중이다. 유치하지만 이 드라마틱한 플롯이야말로 이 소설의 꽃이다.   
 

토니의 치졸한 배신에 샐리가 멋지게 한 방 날림으로써 소설의 종지부를 찍는다. 물론 전적으로 샐리가 그리했을리는 만무하고 역시나 ’도우미’ 가 복병처럼 등장한다. 여기서 빨간 스티커가 안 달린 매력덩어리를 발견하게 되는 데, 그야말로 ’물건’ 이다. 나이젤 클랩이란 변호사 말인데, 겉으로는 어리숙해 보이면서도 할 일은 다하며 기염을 토한다. 키딩 여사나 줄리아, 샐리의 언니까지 조연으로서의 역할...끝내준다. 나는 자꾸만 조연들에게 눈독을 들이곤 하는데, 그건 아마도 내 인생에서만 주인공이고 싶고 타자속으로 들어가서는 충실한 조연으로 조용해지고, 묵묵해지고 싶은 잠재적 충동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결론이자 본론적 재미는 당연히, 마지막 재판과정에서였다. 화장실 앞에서 손에 휴지를 움켜쥐고 ’사용중’ 이란 글자를 째려보며 식은 땀을 흘리듯, 결말을 향한 나의 다급함을 알았는지 아주 속도감있는 전개가 맘에든다.  그럴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결말을 초조하게 기다리도록 만드는 막바지 뒷심도 그만이다.  앗싸, 하는 이 기분.... 카타르시스가 담긴 욕조에 몸을 흠씬 정구고 나온 느낌이랄까. 끈기있게 내리는 빗속에서 읽어서인지 그 후의 느낌치곤 괜찮다. 런던을 배경으로해서일까. 장마철에 어울리는 소설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