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제멋에 겨워 정신없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 사실 오금이 저리도록 매력적이고 보기가 좋다. 그런데 춤을 출 때의 얼굴 표정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것일까? 20분이고 30분이고 춤이 끝날 때까지 항상 재미있고 즐거운 양 웃어야 하는 것일까? 춤을 추면서 즐겁지 않은 기분을 느낄 때도 있을 텐데 그 때에도 웃는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에 나오는 개처럼 춤이 시작되면 항상 웃어야 한다면 그 것은 전혀 인간답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울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대는 것 또한 얼마나 괴상한 짓인가? 비록 그 편이 솔직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지를 흔들어대는 춤과는 맞지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기분이 즐거운 사람만 춤을 추어야 가장 자연스럽고 춤의 본질과도 맞는다는 얘긴데, 순범은 아무리 기뻐도 절로 춤이 나오는 것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p155~156

 

순범은 윤신애의 두 손을 잡고 천천히 움직였다. 윤신애는 봉긋한 가슴을 눌러왔다. 동시에 술기가 묻은 윤신애의 입술이 순범에게 다가왔다. 순범이 놀라며 약간 몸을 뒤로 젖히자 윤신애가 짤막하게 말했다. "인생이란 상식적으로 즐기고 사는 거예요"

그리고는 휑하니 자리로 돌아가서 핸드백을 들고 나가버렸다.

순범은 음악과 윤신애가 던진 말 사이에 멍하니 서 있다가 음악이 끝날 무렵 천천히 플로어를 걸어났다.  "인생이란, 상식적으로 지키고 살아야 할 것도 약간은 있는 법이지."

순범의 독백이 조명등 빛 사이에서 어지럽게 흩어졌다. p157

 

잠시 택시를 세우고 길 아래쪽을 보니 바로 코앞에 골프 연습장이 있었는데, 산을 깍아낸 주차장에는 승용차들로 가득 했다. 순범은 자연보호가 어떠니 환경보전이 어떠니 해도 돈있는 놈들의 돈놀음에 몽땅 결딴이 난다는 생각을 해봤다. 제 모습대로만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경관인가? 이처럼 멋진 산을 깍아서 골프 연습장을 만드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차를 타고 산비탈을 내려오는 길은 열어둔 차창으로 숲의 향기가 흠씬 밀려들어오는, 말 그대로 자연이었다. 본의 아니게 하늘을 이고 숲길을 달리는 북악스카이웨이의 드라이브 재미를 만끽한 셈이었다. p170

 

'무엇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말이오?'

순범은 이렇게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과연 남북 동시 핵사찰이 나라를 위한 일이고, 이를 위해 핵개발의 흔적을 조사하여 모두 미국에 넘겨주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일까? 순범은 정치나 외교 등에 대해 과히 밝은 편은 아니었지만, 대통령과 안기부장이 나눈 대화라는 것을 듣고 나서 무언지 모를 실망감이 가슴 깊숙이 퍼져나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대통령과 안기부장의 얘기니 나라를 위한 깊은 생각들이겠지만, 민족의 백년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한심한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동시 사찰이라는 것이 결국은 이미 핵을 가지고 있는 주변 강대국들에게 우리는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가지지 않겠다는 것을 남북이 서로 조사하여 알려주자는 얘기가 아닌가?

물론 당장 눈앞의 과제인 북한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주체적 방안이라고 생각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역사의 법칙에 벗어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p240

 

"그러나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 우리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닌가? 그것을 막지 못하고서는 아무런 일도 같이 할 수가 없는 것 아니겠어"

"자네는 참으로 답답하군. 그러고도 여론을 이끌어가는 기자라고 할 수 있겠어? 그것은 우리에게 강요되고 있는 외부의 논리이지 진정한 우리의 생각, 다시 말하면 자네의 생각도 아니란 말이야. 자네가 진정으로 한번 생각해보게. 이 어려운 시점에서 참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위해 취해야 할 길은 어떤 것인지 말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북한을 때려잡아 핵무기를 포기시키는 것만이 우이릐 방법은 아닐 거라는 거지"

대통령과 안기부장이 나눈 대화 내용을 듣고 답답하기 짝이 없었던 순범의 가슴에 대석의 말은 시원하게 내려앉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여기에서 끝났지만 순범의 마음 속에 번진 작은 불씨는 술자리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도 꺼질 줄을 몰랐다.p283

 

"그러나 지금은 정부에서 압력을 넣는다든지 하는 일이 거의 없을 텐데요?"

"그 정도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압력의 의미가 좀 다르지. 그들이 싫어하는 것은 정부의 압력보다도 오히려 미국 측의 직접적 눈길일 수도 있겠지. 무엇보다도 그냥 덮어두면 그만인 것을 나서서 뭐하랴 하는 패배주의랄까 노예근성 같은 것이 문제일 거요.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역사의식이 어쩌면 그리도 박약한지......" p326

 

한껏 조명을 줄여 은근한 분위기에서 벽면의 데스마스크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두 한국인의 열띤 토론과 함께 술병은 비어갔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꼭대기에서 내쏘는 빨갛고 푸른 불빛이 교대로 창을 스치는 사이로 뉴욕의 밤은 깊어만 갔다. p343

 

"한국의 대통령이 앞으로 10년 안에 통일이 된다고 말한지 2년이 됐습니다. 귀국의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6년 후면 통일 된다는 얘긴데, 귀국의 노력을 보면 대단히 여렵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군요. 남북 간의 대화도 잘 이루어지는 것 같지 않고요"

머리느 있는 대로 헝클어지고 낡아빠진 청바지에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산 반팔 셔츠를 입고 있는, 다소 너저분한 청년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자 순범은 가슴이 따끔해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 유엔이 동시 가입한 것을 비롯해서 남북 간에 변화가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학생을 위시한 신세대의 통일 욕구도 대단하고, 아마 대통령의 말대로 되겠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독일과 같은 강한 나라도 통일을 준비하는 데 장구한 시간이 걸렸어요. 지금 한국이 들이고 있는 노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죠. 그렇지만 단 하나, 지금은 세계가 변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도 이 변화의 물결에 따를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고수해오던 체제에 균열이 오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 정권은 지금 진퇴양난의 곤란한 입장에 빠져 있어요. 자칫 잘못하면 돌발사태가 일어나게 되고, 이것은 막바로 남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죠" )p352

 

"광주항쟁 때는 한 달간 술독에 빠져 있었지. 지금 생각하면 그땐 우리가 비겁했었어."

"글쎄, 지금 다시 그런 일이 생겨도 썩 용감해질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죽은 사람만 억울하단 얘기야?"

"그래서 안 되지"

"그럼 자네 결론은 뭐야"

"글쎄, 참 어려운 문제군, 역시 자넬 만나면 이런 대화가 되는군."

 

"광주항쟁만큼 어물쩡 사기 당하고 넘어간 것이 없잖아?"

"자네는 사기를 당한 축에 끼는 모양이지?"

"그걸 말이라고 해? 그 많은 억울한 죽음과 역사의 왜곡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야 할 것 아닌가?"

"나도 뭘 좀 주어야겠구먼, 나느 요즘 와서는 사기를 친축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다들 자네처럼 생각하니 그 엄청난 범괴가 어물쩡 넘어가고 마는 것 아닌가"

"사기를 놓쳤어"

"사람들이 죄다 그렇게 뜨듯미지근하니 민족이 있나, 역사가 있나" p437

 

'내가 하려고 하는 행위가 과연 옿은 것인가? 나의 행위는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오늘 나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든 사람을 죽이는 행위 자체는 범죄가 아닐까? 우주의 법칙에 의해 생겨난 고귀한 생명. 누구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타인의 생명. 이 생명을 어떻게 나는 그의 의사에 반해 죽일 수 있을 것인가? 그가 더 큰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인가? 내가 그를 죽이는 것은 이유야 어쨌든 범죄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가? 법적으로는 틀림없는 살인죄. 그러나 나라와 동포를 위해 반역자를 죽이는 것을 어떻게 범죄라 할 것인가? 지금처럼 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라를 대신하여 반역자를 처단하는 것은 전쟁에 나선 군인과 같이 오히려 떳떳한 일이 아닌가? 전쟁. 이것이 바로 전쟁이 아닌가?'

막상 사람을 죽여야 하다고 생각하니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수 ㄴ간 하나 확실한 것은, 자신이 이한수를 떠맡았다는 것이었다. p315(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