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간단한 이야기 하나. 며칠 전 사우나에서 생긴 일이다. 밖으로 나오기 전에 온도차를 줄일 겸 잠시 앉아 있는데, TV 드라마채널에서는 2,3회차의 지난주 드라마 연속방영을 하고 있다. 종방에 가까워진 <마의>다. 44회인가, 두세 명이다가 서너 명이다가 모두 아저씨들인 시청자의 수는 왔다갔다 한다. 뭐 대단한 이야기라고 40회를 넘기면서까지 저러고들 있나 생각하가. 나는 눈을 감고 마땅히 머물 곳도 없으니까 거기 앉아 대사를 듣고 있었다. 신분이 뒤바뀐 남녀 주인공은 서로 연인 사이다. 이제 패를 뒤집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극과 극으로 처지가 뒤바뀔 수 있는 비밀을 지녕(이요원 역)이만 모르고 있었나 보다. 그 비밀을 알려주는 수의녀.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지녕. 그래서 그랬던 것이군요! 모든 것은 이 한마디에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갑자기 뒷편에서 중년 사내의 굵고 큰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저것들이 저랬던 거였어!" 깜짝 놀랐으나(사실 나는 그날치 드라마의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 뒤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 중년 사내는 집안 식구들이 넋을 놓고 드라마에 빠져 있는 상황이 한편 답답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띄엄띄엄 보면서 저 사람들이 왜 저러는 것일까, 무지 답답했던 것인데, 결정적인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에 맞아 이게 결론이야 하면서 그 대단한 발견(?)의 기쁨에 큰 소리로 마음 속얘기를 입밖으로 내뱉은 셈이다. 사실 시청자들은 그 비밀을 오래 전, 극이 2,3회 정도 진행될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때가 되면 그 드라마를 시간에 맞춰 숱한 밤들의 스케줄이 맞춰졌을 것이다. 문득 회사에서, 각종 조직에서 진행되는 회의 광경을 떠올렸다. 프로젝터를 이용해서 열심히 프로젝트를 설명하는데, 답답한 CEO는 "그래서 결론이 뭔데!" 하는 말로 프리젠테이션을 중단시킨다. 결론이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은 뭔데, 이익이 얼마이고 매출은? 핵심을 짚어내지 못한 프리젠테이션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궁극의 이익, 결과론으로 접근하는 방식에 익숙한 세대들이고.. 어쨌거나 나는 문득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면서 글 하나를 정리해보고 싶었으나, 아주 새로운 내용이 아니니 내용을 요약하기도 그렇고, 그동안의 번역들이 어떠했다는 식으로 같은 내용의 저작물들을 비교할 처지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고민을 하던 참인데, 뭔가 풀리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동안 고전들의 원전번역이 여러 뜻있는 출판사들과 번역자가들에 의해 쏟아지고 있음에도, 지난달 하순경에 출간된 천병희 선생이 옮긴 플라톤의 <국가>의 발행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책을 구입할까 말까를 고민한 것이 아니라 일단 잡으면 다른 일에 지장을 줄 것인데(금방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어쩍하지 하는 고민을 억누르고 책을 읽기 시작했고, 독을 하는데 3일이 넘기지 않았다. 잘 읽혔다. 잘 읽히는 소설을 탐하는 기분으로 읽어나갔다. 대학에서 한 학기의 교재로 감독하기에도 빠듯할 분량의 내용을 이렇게 술술 읽어나가도 되는 것일까? 하긴 나는 이 책을 읽고 학점을 받기 위해 리프토를 쓰거나 시험을 봐야할 의무는 없다. 오히려 못된 성격 때문에 일단 교과서로 이 책을 접했다면 게으름을 피웠을 것이고, 끝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플라톤은 이상국가를 제시했다. 초반에는 여럿이 등장하지만 대부분의 분량에는 소클라테스와 글라우콘(플라톤의 형인거나 아우인)의 1:1 대담이 주를 이룬다. 흔히 남녀의 하룻밤 정을 하룻반에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하는데, 어느덧 '우리'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워진 그들은 우리의 나라를 뚝딱뚜딱 건설해나간다. 그런데 과연 그런 정체가 가능할까, 글라우콘은 묻고,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해달라고 조른다.(이하 5권) 소크라테스는 이상국가의 이론적인 본보기는 설사 그 실현 가능성이 입증되지 않더라고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고 운을 떼고 나서, "이상국가는 철인이 왕이 되거나 왕이 철인이 되기 전에는 실현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유명한 철인정치론이다. 젊은 나이에 스승 소크라테스를 무력하게 저세상으로 보내고,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던 플라톤(이 대화편의 집필자가)이 말하는 철인의 모범은 스승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비록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이 철인정치를 이끌 모범답안으로 생각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철학에 가장 해악을 끼치는 것은 사이비 철학자들이다. 이들은 온갖 유혹을 이기고 살아남은 소수의 진정한 철학자들보다 그 수가 훨씬 많다. 나라가 망하지 않으려면 어떤 방법으로 철학을 대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철학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니 플라톤은 어쩌자는 것인데? <국가>를 읽어가는 동안 나는 그동안 그저 읽어야 하니까 읽는, 그러면서도 <국가>를 제대로 읽지 못했으며, 그것은 고등학교 시절 열정적인 국민윤리 선생의 안내가 있었음에도, 학력고사 전체 점수에서 출제될 이 과목이 차지하는 비중, 그 중에서도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나올 확률 등, 그렇게 결론이 뭔데, 플라톤 이상국가론, 철인정치, 시인을 추방되어야 하고, 동굴이 어떻고 모방이 어떻고.. 그렇다면 그 이후의 독서는 어떠했던가, 불의한 정권에 항의하고, 국가가 대체 뭔데, 왜 이런 나라에 복종하며 살아야 하는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에도 플라톤의 <국가> 자체를 만나려는 노력보다는 숱하게 주석되고, 나름대로 당대의 입맛에 맞게 얘기하는 '국가'에 익숙해진 것이 아니었던가, 되짚어보게 되는 것이었다. 

국가에는 이상적인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 철학자들만이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주장은 매우 단정적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심플하다고 말할 수 있고, 결론에 이르는 과정도 주석을 달기 시작하면 심오한 얘기자만 외견상은 그렇게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결론이 뭔데?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차분하게 전편을 완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44회에 이른 드라마를 줄곧 지켜본 시청자들이 정말 바보라서, 그렇게 줄곧 이야기의 대체도 더딘 진행을 참았던 것일까?  플라톤은 국가란 무엇인가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그 과정에서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는 국가, 국가에서의 정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다. 결국 정의란 무엇이며 왜 실현되어야 하며,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가를 강조하기 위해 단호한 선택, 과감한 버림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문제로 다가오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했을 때 히틀러를 비롯한 불의한 정체(국가)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어려워진다는 철학 공부하는 친구들의 말에도 맹점은 있다. 가령, 국가의 경우를 집(주거)에 비유한다면, 집의 종류보다는 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최초의 정의에 집중하고 있는 것인데, 집의 종류나 아파트가 어떻고 타워팰리스가 어떻고.. 스승이지만 그에 비판을 하고 유연하게 이모저모를 거론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렵고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정작 플라톤이 왜 이런 식의 대화를 전개했는가에 대해서 너무 가볍게 혹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면 모르는 것인데(소크라테스의 빛나는 말씀처럼) 안다고 생각하면서 무지를 방치해왔던 것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결과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리말 플라톤전집은 아직 완간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말씀으로 진행되는 '대화편'의 상당수가 현재 번역된 상태를 보면, 텍스트 자체보다도 더 방대한 주석과 해설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당연히 필요한 절차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플라톤의 저작을 특히 <국가>를 비롯한 대화편을 어려운 철학서적으로 대하기에 앞서, 쉽게 읽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우선은 애초의 스승과 제자들 사이에 대화가 그러했듯이, 그 자연스런 흐름에 독자들이 참여하게 만드는 번역이 선행되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나, 천병희 선생이 옮긴 이번의 <국가>와 지난해에 나온 <소크라테스의 변론, 파이돈 크리톤 향연>을 읽으면서 참 다행이고, 지금이라도 대화편에 '참전'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원전을 의미를 되도록 알기 쉽게 전달하고자' '플라톤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난삽한 문장을 읽기 좋은 우리말로 옮기'기 위해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앞서 펴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천병희 숲 펴냄)에서도 그러했지만, 권별로(국가), 권의 장별로(정치학), 간략한 내용정리가 되어 있는데, 이번 국가는 책의 앞머리에 <작품소개>라는 이름으로 9면에 걸쳐 내용을 간명하게 요약해 놓았는데(이 부분을 필사했다), 책을 읽는 동안(읽기를 멈춘 지점에서 다시 읽어가기 시작할 때에도 그렇고)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준다. 또한 그동안의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 시리즈로 펴낸 책들의 종수와 권수가 늘어갈수록, 옮긴이와 출판사 편집자의 팀워크가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무슨 얘기냐면, 그리스 비극전집(3대 작가)과 희극전집(아리스토파네스)은 그야말로 대사 중심의 희곡이다. 그리스로마 에세이 들의 상당수도 플라톤의 대화편 저술들에서 받은 영향이 크다. 그러므로 대화형식의 책을 원전 그대로의 느낌을 살려 한글판 텍스트를 고정하기까지의 기간의 경험들이, 이번 <국가>가 쉽게 읽히는데에 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2권과 3권 그리고 10권에서 마치 언론통제를 하는 '보도지침'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시인(호메로스를 비롯하여)의 작품세계에 과도하게 '개입'을 하지만, 정작 <국가>를 문맥을 이해하려면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등을 철저히 읽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곳곳에서 인용하고 있는점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물론 <국가>는 분화되기 이전의 숱한 학문의 원조에 해당하는 이론들을 함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철학>의 고전으로 여기기에 앞서, 플라톤이  나름대로 혐오하였으나 부정하지 못하였던 그리고 그가 이상적으로 주장한 문학작품이란 어떠했야 하는가의 모범답안을 제시한 작품 <국가>로 소화해보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천병희 선생의 <국가>는 스스로 플라톤의 작품과 만나게 하는 탁월함이 담겨 있다. 사람은 소통하기 위해 대화한다. 2500년이 흘렀지만 대화 자체가 그렇게 어려웠을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