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눈살을 찌푸리지 마라. 업신여기지 마라. 비판은 심신을 긴장시키고, 경멸은 감정을 마모시킨다.이 맹속력으로 질주하는 대도시에서 거덜 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아주 약간 핥는다든지 깨문다든지 쓰다듬어 봐야 한다. 호기심을 잃는 순간부터 사람은 조금씩 죽어간다. 눈앞의 현실을 자신과 관계없는 것이라고 판단한 순간부터, 받아들인 현실은 체를 치듯 숭숭 빠져나간다. 

온다리쿠, 코끼리 귀울음 <신 D고개 살인사건> 中에서

코끼리와 귀울음은 요변천목의 밤, 신 D고개 살인사건, 급수탑, 고끼리와 귀울음, 바다에 있는 것은 인어가 아니다, 뉴멕시코의 달,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 폐원(廢園),대합실의모험, 탁상공론, 왕복 서신, 마술사 등 12개의 다양한 단편들로 구성되어있다.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오는 이야기들 이지만 그 속에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이야기에서부터 괜히 섬뜩해지는 기분을 전달해주는 이야기까지 총 집합된 종합선물셋트 같다.

코끼리와 귀울음은 단편인데도 단편이지 않게 만드는 묘한 재미가 있는데 (그덕에 단편을 별로 안좋아하는 나도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전직판사 출신인 세키네 다카오 가족때문인 듯.

전직 판사인 아버지도 오~ 하게 만드는 존재인데 현직 변호사인 딸 나쓰, 현직 검사인 아들 슈운까지 ~ 아주 흐뭇한 조합 !!!

12개의 단편중 급수탑, 폐원, 대합실의모험, 탁상공론을 아주 재밌게 읽었다.

특히 탁상공론은 넉 장의 사진속 방을 놓고 현직 변호사인 나쓰와 검사인 슈운의 두뇌싸움을통해 그 두사람을 조금은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귀한 이야기. 겉으로 보기에 차분하고 조심스러워 보이는 슈운과 눈에 확 띄는 화려한 성격에 대담하고 역동적이지만 실제로는 반대라는 것을. 슈운이 때가 되면 얼마나 대담하게 승부에 나서는지 나쓰가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세심하게 계획을 진행시키는지. ’반대’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경쟁심리를 맘껏 즐길수 있는 이야기이기에.

법조인 가족의 명추리를 통한 똑똑한 단편 이야기들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이 책을 읽는 당신 역시 미스터리 팬이라면 . . 

미스터리팬인 전직판사 ’세키네 다카오’님이 이야기마다 예를 들어주는 책 설명에 수첩에 그 책 제목을 적어대느라 바쁠것이다. 난 이런식으로 책이 책을 부르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읽기를 좋아한다. 신 D고개 살인사건에서는 에도가와 란포의 <D고개 살인사건>, 급수탑 에서는 에도가와 란포의 <파노라마 섬 기담>, 뉴멕시코의 달에서는 조세핀 테이의 <진리는 시간의 딸> 이라는 고전적인 역사 미스터리로 입원중인 형사가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리처드 3세의 실체를 추리하는 유명한 안락의자 탐성 소설.

폐원에서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운명의 뒷문(우리나라에는 운명의 문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으나 원제는 운명의 뒷문이라고)>,<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대합실의 모험에서는 해리 케멜먼의 <9마일은 너무 멀다> 주인공이 우연히 들은 9마일은 걷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빗속이라면 더욱더’ 라는 별 것 아닌 듯한 말에서 순수한 추론을 거듭해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

탁상공론에서는 반 다인의 <그린살인사건>, 왕복서신에서는 방화소설 <금각사>,<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술사 에서는 히카게 조키치의 소설 <빨간개>  

열심히 적은 보람도 없이 작가 후기에 친절히 적어놔주신 온다리쿠님. 왕복서신쪽을보니 이 교정해주신 분이 다다미치 다로씨의 <변신 방화론>을 가르쳐줬다며 적어주시기까지 으흐흐 ~  

시간도 많지만 그것보다 더더욱 읽을책이 많음을 일깨워준 책이라고나 할까 ~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 내가 좋아하는 장르인 미스터리. 이보다 더 찰떡궁합인 조합이 있을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