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하더니만, 상처 입은 모습으로 인형의 집에 도착한 인형들 역시 제각각 담고 있는 사연이 예사롭지 않다. 인형 할머니의 마술 같은 손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인형들은 밤마다 자신들이 겪어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인형들은 사람들이 깨어 있는 시간엔 사람들의 손에 의해 움직이고 때론 순수한 동심과 만나 마음도 주고받지만, 더 자유롭고 활기찬 시간은 역시 사람들이 모두 잠들고 난 이후다. 밤이 되면 인형들은 한자리에 모여서 제각각 자신들이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하며 서로 위로해주고 공감하는 시간을 갖는다.

관광 상품으로 팔 이쁜이를 만들던 공원 아가씨의 간절한 바람과 그녀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는 이쁜이 이야기, 입양아 존이 외롭지 않게 아이를 닮은 인형 꼬마 존을 만든 양어머니의 사랑과 친엄마를 잊지 않으려 매몰차게 양어머니를 대한 존의 가슴 아픈 이야기, 노예로 팔려간 쥬릴리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희망과 용기를 배운 릴리 이야기 등 인형들의 삶은 그 인형들과 함께 한 사람들의 삶 못지않게 파란만장하다.

이 인형들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에 근거하거나 적어도 인형이 만들어진 시기에 맞물린 배경과 어울리는 이야기를 안게 된 것은 김향이 선생님이 꿈 덕분이다. 선생님이 ‘동화나라 인형의 집’에서 때론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때론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인형들을 동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김향이 선생님의 독특한 동화 「꿈꾸는 인형의 집」은 나를 잠시 10대의 나이로 거슬러 데리고 간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장난감 이외의 것을 가져보지 못했던 내게 유일하게 허락되었던 사치는 종이인형이었고, 그 종이인형에게 새 옷을 입히고 싶어서 노트에 인형을 대고 열심히 옷을 만들어 오려 입혔던 열 살의 나. 봉제 공장에서 일하시던 막내 외삼촌이 선물해주신 하얀 곰돌이 인형을 한시도 내려놓지 않고 온 동네를 쏘다니던 다섯 살 막내 동생의 모습을 바라보는 열네 살의 나. 열네 살도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건만 새까만 곰돌이의 플라스틱 눈동자가 긁혀서 허옇게 일어나는데도 무엇이 그리 예쁘다고 잠잘 때까지 끌어안고 잘까 싶어 마음이 짠했던 기억은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막둥이와 그 곰돌이 인형은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지? 헤어진 후로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한 마음을 일게 만든다.

지금 딸아이 방에는 갖가지 인형이 스무 개 남짓 있다. 일부러 사서 모은 것도 아니건만 생일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면 으레 한 두 개의 인형을 선물로 받다보니 어느새 장롱의 절반을에 처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꿈꾸는 인형의 집」을 읽고 나서 찬찬히 돌아보니 이 인형들 역시 만들어지면서, 운반되어지면서, 포장되어 우리 집에 오기까지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있을 것인데, 내게 이런 푸대접을 받으면 안 되지 싶다. 우리가 잠든 사이에 우리 집 인형들이 나눌 이야기는 행복한 이야기가 가득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