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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문학의 세계는 그 깊이와 넓이를 측량할 길 없는 난바다와 같다. 판타지 전성시대라 하지만 영화는 판타지의 거대한 세계에 살짝 발끝을 들여놓았을 뿐이다. 판타지 마니아들의 추천을 받아 영화화를 바라는 희망 목록을 만들어봤다.

와이즈맨 | 마사야 호카조노 | 삼양 | 2000
우리에게 익숙한 판타지는 엄밀히 말하자면 ’하이 판타지(high fantasy)’이다. 검과 마법, 드래곤과 매직 등 인류 역사와 동떨어진 이세계(異世界)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상상 서사의 향연들인 셈. 하지만 우리가 몸담은 자연과 일상을 새삼 다시 보게 만드는 독창적 시선들에도 관심을 가져봐야 하지 않을까? 의외로 재미있다! 마사야 호카조노는 <견신>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와이즈맨>은 도시괴담처럼 시작된 이야기가 세계에 대한 인식론적 변환으로 발전하는 숨은 걸작이다. 실종된 여인을 찾아 미국으로 떠난 주인공은 인디언의 사막에서 초자연적인 경험들을 겪은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뭇 생명들과 합일하는 존재로 거듭나 거대한 변화를 이끈다. 엔딩에서 암시하는 세계의 변화는 상상만 해도 두근두근하고 아찔할 정도. 박상준(월간 판타스틱 편집장)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 필리파 피어스 | 시공주니어 | 2000
세상이 황량하고 시간이 지루하고 일이 잘못돼 가는데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우리는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으로 통하는 통로가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거라 믿었다. 닫힌 문, 어둡고 더러운 구석, 갈라진 길, 크고 작은 상자들, 지평선, 커다랗고 무성한 구름과 같은 것들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동생이 걸린 홍역 때문에 방학을 신나게 보낼 기회를 뺏기고 이모의 삭막한 다세대 주택에 머물게 된 톰, 심심하고 억울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열세 번째 괘종시계 소리를 듣는다. 살금살금 계단을 밟아 내려가 보니, 낮에는 쓰레기로 가득 찼던 좁은 뒤꼍에, 달빛이 쏟아지는 넓고 아름다운 정원. 정서경(<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시나리오 작가)

드래곤과 조지 |고든 R. 딕슨 | 시공사 | 1999
흔히 용이 나오는 이야기라고 하면 사악한 용과 대결하거나, 혹은 용과 함께 악을 물리치는 용사의 이야기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 작품은 다르다. 바로 주인공이 용. 그것도 인간의 영혼이 들어간 용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깨어나 보니 난데없이 용의 몸 속에 들어가게 된 주인공. 용의 생활 따위는 전혀 모르는 그가 걸음마를 걷는 아기처럼 용으로서의 자신에 익숙해지고 나아가 동료들과 함께 사악한 존재를 물리친다는 이 작품은,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용의 생태와 습성을 매우 흥미롭게 연출하고 있다. 신나게 날아다니는 데 열중한 나머지 날개의 근육통으로 고생하는 용이라니 우습지 않은가? 1982년 이 작품을 바탕으로 <드래곤의 비행>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제작돼 눈길을 끌었지만, 정작 중요한 요소(용의 몸 속에 들어간 사람)는 포함되지 않은 만큼 21세기의 기술로 새롭게 만들어줬으면 한다. <드래곤 하트> 외에 용이 나온 영화는 유치하다는, 징크스를 깨기 위해서라도. 전홍식(게임평론가, JoySF 시삽)

앰버 연대기 | 로저 젤라즈니 | 예문 | 1999
<앰버 연대기>는 흥미진진한 대중적인 판타지 대하물이다. 이 소설의 매력은 평범한 성인 남성들의 판타지라는 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에서 주인공 코윈은 시종일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코윈이라는 이름 자체가 일종의 바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나름대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고 애쓰지만 녹록지 않다. 즉 일종의 영웅담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영웅의 풍모를 갖추지 못한 미숙한 사내의 투쟁과 실패의 과정을 그려나간다. <앰버 연대기>가 아직까지 영화화되지 못한 이유라면 작품 특유의 여러 설정들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쉽지 않았다는 기술적인 장벽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제 기술적인 문제를 논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세상이 됐다. 무엇보다 <앰버 연대기>는 확고한 주제의식과 스토리텔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현란한 특수효과에 현혹돼 내러티브가 무너지기 어렵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김태영(동양공업전문대학전임강사, SF/판타지 평론가)

꿈꾸는 책들의 도시 | 발터 뫼르스 | 들녘 | 2005
상상의 대륙 차모니아, 젊은 공룡 미텐메츠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미텐메츠는 위험천만한 모험에 휘말린다. 거대한 책의 도시 아래 자리한 지하 미로에서 흥미진진, 아슬아슬한 모험담이 펼쳐진다.("무시무시한 성 밑에는 지하실이 있기 마련, 그리고 어떤 지하실에든 괴물이 산다.") 작가의 상상력 자체도 매우 훌륭하지만 행간 사이사이의 유머감각도 빼어나다.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하는 공포, 사람의 슬픔과 이별의 고통, 죽음의 두려움. 책을 읽으며, 아니 살아가며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담고 있는 멋진 소설. 따라서 발군의 상상력으로 빚어낸 그 캐릭터들이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걸 보고 싶다는 건 당연한 희망사항. 부흐링족들이 책을 ’먹는’ 광경이나 책의 미로 속에서 그림자의 제왕에게 쫓기는 장면, 책 초반 미텐메츠가 ’살해’당하는 장면까지. 이 소설 속에 인간이라곤 등장하지 않으므로 영화화하기엔 많은 난관이 예상되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꼭 살아 움직이는 미텐메츠와 부흐링족, 그들의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 박하영(인터넷 서점 알라딘 문학담당 기자)

Wild Seed | 옥타비아 버틀러 | Warner| 1999
옥타비아 버틀러의 ’Wild Seed’를 추천하고 싶다. SF인지 판타지인지, 그 경계선은 조금 모호하지만 판타지라고 해도 문제는 없다. 소설의 내용은 거의 신처럼 묘사되는 불사자인 두 남녀의 이야기다. 남자는 숙주를 옮겨 다니며 사는 영적인 존재고 여자는 자유자재로 외모를 바꾸는 초능력자다. 이 둘은 17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길고 복잡하고 종종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 애증이 뒤섞인 관계를 맺는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여럿 있는데, 일단 아프리카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몇 안 되는 판타지/SF이고 소설이 그려내는 몇몇 시각적 이미지가 굉장히 압도적이다. 특히 변신술에 능한 여자주인공 Anyanwu의 묘사가 그렇다. 지금 같은 CG시대엔 한번 다뤄볼 만한 소재일 듯하다. 듀나(영화평론가)

마술사가 너무 많다 | 랜달 개릿 | 행복한책읽기 | 2006
마법이 과학처럼 발전한 20세기의 런던에서 일어난 불가해한 밀실살인사건을 다룬 걸작 미스터리물. 기술 수준은 아직도 가스등과 증기기관차 정도에 머물러 있지만, ‘과학적 마법’이 놀랄 정도로 발달한 또 하나의 20세기 유럽을 무대로, 천재탐정 다아시 경과 법정 마법사인 숀 오 로클란의 활약상을 그린 이 소설은 전설적인 미스터리 SF 다아시 경 시리즈 3부작 중 2부이자 유일한 장편으로, 추리와 스릴러와 판타지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랜달 개릿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마술사들의 컨벤션이 열리고 있는 고급 호텔에서 수많은 마술사들이 지켜보고 있는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밀실살인사건. 런던의 짙은 안개 속에서 펼쳐지는 쫓고 쫓기는 첩보전. SF의 하위 장르 중 하나인 대체역사소설이면서도, 미스터리나 스릴러, 또는 추리소설이나 판타지로 읽을 수 있다. 내용, 재미 측면에서 영화화하기에 딱이다. 주인공 다아시 경 역으로는 이완 맥그리거를 추천! 임형욱(도서출판 행복한책읽기 대표)

어두워지면 일어나라 | 샬레인 해리스 | 열린책들 | 2006
뱀파이어들이 법적으로 비사망자로 인정받고, 소수자로 세상을 당당히 돌아다닐 수 있는 시대. 루이지애나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수키는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축복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능력으로 인해 사람을 사귀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어느 날 바에 매력적인 남자 뱀파이어 빌이 나타나고 수키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빌이 마을에 온 후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으로 뱀파이어가 의심받는데…. <어두워지면 일어나라>는 샬레인 해리스의 ‘남부 뱀파이어 미스터리 시리즈’ 중 하나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미스터리보다는 로맨스에 훨씬 가까운 이 소설이 영화가 된다면? 벌써 어떤 주인공이 캐스팅될지가 기다려진다. 박예진(소설가, 거울웹진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