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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음력 8월 20일, 기울어가는 조선 왕조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의 낭인들이 해산을 통고받은 조선 훈련대를 앞세워서

궁궐을 습격하고 왕비를 시해하였던 것이다.

역사에 '을미사변' 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진 이 사건은,

단지 궁중의 여인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다.

탁월한 지혜와 용기로 망국의 위기에 처한

왕실과 나라를 홀로 버텨갔던 그녀의 죽음 후에

조선왕조는 급속도로 기울어

10년 만에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5년 후에는 멸망하고 만다.

사후에 명성황후로 추존된 중전 민씨의

순국 백 주년이 되는 1995년을 맞아

한국 공연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대규모 프로젝트가 기획되었다.

바로 "명성황후" 라는 제목의 창작 뮤지컬이 제작된 것이다.

뮤지컬의 대본을 맡게 된 사람은

당대 최고의 소설가였던 작가 이문열.

그렇지만 뮤지컬 대본을 쓰는 일은 소설과는 전혀 달랐다.

아직까지 뮤지컬은 낯선 쟝르였고

그 또한 고작 "레 미제라블" 한 편을 봤을 따름이다.

대본을 쓰기러 결정된 후에 영국 웨스트엔드와 미국 브로드웨이로 가서

부랴부랴 몇 편을 더 보기는 했으나,

막상 직접 대본을 쓰려고 하니 막막하기 그지 없었던

심경이 고스란히 서문에 담겨 있다.

그에 못지 않는 곤란은 명성황후(이 책에서는 시종 '민비' 라고 나온다)라는

인물에 대한 해석이었다.

조선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암탉 정도로

철저하게 왜곡되어진 그녀에 대한 인식이,

보수적이고 완고한 관점을 가진 이문열로서는

애정을 가지고 감동적인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데 장애가 되었다.

작가 스스로에게조차 감동을 줄 수 없는 작품이

도대체 어떻게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쟝르에 대한 이해 부족과 인물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가 반영되어

탄생한 것이 각본집 「여우사냥」이다.

제목부터 너무나 끔찍하다.

조선의 왕비를 시해하려고 도모한 일본의 작전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러시아 등의 열강이라는 호랑이를 등에 업고 호령하는 중전이,

조선을 송두리째 집어 삼키려 했던 일본인들에게는

그야말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여우 같은 존재였다.

뮤지컬을 먼저 보고 원작이라는 이 각본집을 읽게 되었는데,

뮤지컬이 그녀가 왕비가 되었던 때부터 시작되는 것과는 달리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그 시작이었다.

30년에 걸친 생애를 담아낸 뮤지컬에 비해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의 배경이 매우 소상하게 담겨 있었다.

작가의 고민이 담겨진 이 원작의 표현들은

적절하게 44곡의 노래로 만들어져 뮤지컬이 되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노래에 쓰였던 표현들을

곳곳에서 발견하는 재미를 느꼈다.

또 다른 흥미는 뮤지컬이나 드라마에서는

조금 밖에 다뤄지지 않았던 인물들이

원작에서는 비중 있게 나온다는 점이었다.

선교사의 부인이었던 언더우드 부인의 명성황후에 대한 설명은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이 세상의 어떤 여왕보다 기품 높으신 분.
힘과 지성을 아울러 갖추신 여걸.
민완한 책략가이시자 유능한 외교관.
백성의 복지를 찾아 밤잠을 설치시고
나라를 위해서는 한 몸을 던지실 이.
왕비 폐하가 계심으로 조선도 지켜지리."

또 한 명의 인물은 시위대를 지휘했던 미국의 노 장군 다이.

제 나라 국모의 죽음 앞에서 태무심하던 가운데

외국인이었던 그가 목숨을 걸고 왕비를 지키려고

보잘 것 없는 무기를 보유한 시위대를 지휘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잡히고 만다.

왕비 시해 후 그가 하는 말이 폐부를 깊이 찌른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왕실도 조선도.

그 백성이 지키려 하지 않는 왕실을
이방의 한 노병이 홀로 어찌 지키리.

조선이여, 조선의 치자여, 그 백성이여.
그대들은 군함을 말하고 대포에 핑계대나
나는 진정으로 이 나라와 이 민족이
일본에 뒤진 게 무엇인지를 이제 안다.

일본의 왕실은 조선보다 더 무능했고
지배계급은 훨씬 잔인하고 비정했으며
그 백성 역시 수백 년 억눌리고 빼앗겼으나
외세의 침략 앞에서는 분연히 단결했다.

그런데 그대들 조선의 신민은 어디에 있었느냐.
그대들의 왕궁이 외적의 총칼에 에워싸이고
그대들의 왕비가 여우처럼 사냥당할 때."

이문열 「여우사냥」…

다소 어설프게 생각되는 이 각본집을 바탕으로

뮤지컬 종주국인 영국의 비평가들조차

세계 5대 뮤지컬 중 한 편으로 극찬하는 대작이 완성되었으니

충분히 제 역할을 감당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