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 벌어지면 가장 말빨이 센 사람은,
그 주제에 대해 책 한 권만 본 사람이라고 한다.

조금만 더 알면 훨씬 다양한 생각이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니깐,
그 책의 내용만 곧이 곧대로 들이대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조우석의 <굿바이 클래식>이라는 책이
화제에 올랐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클래식 울렁증’을 벗어던지고
살아있는 음악으로서의 클래식을 촉구했다는 장점이 있다만,

.. 그냥 제목만 보고, 클래식과 영영 작별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강한 우려 또한 들었었다.


그러던 차에 가을 들어 클래식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시작된다고 해서 
엄청난 기대감으로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 딱 3부 까지만 보고 말았다.


무슨 케이블 방송에서 찍은 ’모여라 꿈동산’ 도 아닌
공영방송의 프라임타임 드라마임에도, 
시중의 음반을 틀어놓은 듯한 연주...  

.. 저런 공간 구조에서 이렇게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다는 점...

.. 무엇보다도, 흘러나오는 음악이 연기하는 사람의 모션과 전혀 맞지 않아..

.. 어설프게 <카핑베토벤>과 <노다메 칸타빌레>의 흉내나 내었다는 실망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마에라는 특이한 인물
(뭐, 카라얀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별로 특이하지도 않았지만)
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 이 드라마를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론이 너무 길었구먼..

드라마에 살짝 살짝 나온 노래들을 묶어서,
감칠맛만 본 시청자들에게
한 보따리 푸짐한 ’종합 과자 선물상자’ 같은 음반이 나왔다.


극 중에서 여러 번 물어지는 질문...

"클래식은 (                                    )이다."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종합 과자 선물상자’이다.

요즘 같이 풍요로운 시절의 아이들이야
’종합 과자 선물상자’가 무에 그리 대수로울까 싶겠지만,
벌써 서른을 넘어선 지도 한참 된 나에게 있어
종합 과자 선물상자는 그 무엇보다 귀한 선물이었다.

커다란 상자 속에 평소에 먹어 보지 못했던 과자들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보는 기쁨...



클래식 음악의 매력은 ’다양성’이다.

수 백년의 시간 동안 여러 작곡가에 의해 쓰여지고,
여러 뛰어난 연주자들에 의해 들려졌던 음악들은,

... 그 때 그 때 새로운 감동으로 우리에게 들려진다.


음악을 ’시간 예술’이라고 함은,
음악을 듣는 동안 시간이 필요하는 의미 뿐만 아니라..

.. 그 음악 안에, 우리네 삶의 소중한 편린의 추억들 또한 담겨 있어서,
그 음악을 들을 때 그 시절의 나 자신과 조우 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의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얘야, 인생이란 ’쵸콜렛 상자’란다."

선천적인 장애들 가지고 태어난 아들이었지만,
다음에 어떤 쵸콜렛이 나올 지 모르니깐
순간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라는 의미로 했던 말이었는데..


이 음반을 들으면서
나는 쵸콜렛 상자에서 쵸콜렛을 하나 하나 꺼내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음악이 나왔던 드라마의 장면도 생각나고..

10여 년 전 부터, 제대로 못 먹고 굶어가면서 
용돈 아껴서 샀던 클래식 테이프
늘어나서 더 못 들을 때 까지 들었던 
때로는 감동적이고, 더욱 많은 신산스러웠던
그 시절의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이 음반이 출시 된 ’도이치 그라모폰’은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클래식 레이블이다.

얼마 전 조수미 씨가 20년 만에
자신의 이름으로 이 레이블에서 새 음반을 내면서
그 토록 감격했다는 그 음반 레이블이다.

그런 음반사이기에, 
보유하고 있는 음원들 또한 최고 수준이다.


물론, 드라마의 인기를 빙자하여
불황의 클래식 시장에서 좀 팔아보자고 만들었을 꺼라는
생각도 들지만...

... 시중의 꾸러미로 파는 이름도 모르는 연주자들을
대단한 양 과대 포장한 음반들과는 품격이 다르다.

클래식 음악은 들으면 들을 수록 좋아진다.

드라마에 등장하여 관심이 생긴 음악을,
이렇게 좋은 연주자의 연주로 제대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노래 참 많지만, 몇 곡만 소개하면..


베토벤, 바이올린 로망스 제2번

두루미가 자신이 음악이라는 것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노래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했던 그 노래이다.

(사람 사는 게... 밥 먹고, * 싸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던..^^;;)



모리꼬네, 넬라 환타지아 (원곡: 가브리엘의 오보에)

강마에가, 어설픈 석란 시의 프로젝트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진정한 음악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었던 노래이다.

(오케스트라가 실내에서, 갑자기 시원한 바람 부는 풀밭으로 나가서 연주하던..)



로시니, 윌리암텔 서곡

프로젝트 오케스트라가, 심혈을 기울여 연습했던
맞추기 어렵다던 그 노래.

조소를 퍼붓던 정명환의 기립 박수를 유발했던 그 음악이다.



피아졸라, 리베르탱고

강마에에게 수모를 당하고
오케스트라를 뛰쳐나갔던,
정희연 씨가 첼로로 혼자 연습하여
당당하게 솔리스트로 나섰던 그 곡...


... 드라마에서 인상적이던 노래는 그 정도이다.


좀 건방진 소리인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 보면서
’천박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저 나이에, 저 정도의 위치이면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 뭐 클래식 들어야 품격이 높아지는 건 아니겠지만,

.. 적어도 인생에 있어서
자신의 얄팍한 깜냥으로 무시할 수 없는,
예술의 깊이를 느끼고 좀 겸손해 지지는 않을까...



드라마와 이 음반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종합 선물상자’같은 클래식에 대한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소중한 역할을 해 주길 바래보면서..

.. 미흡하나마 한 숟가락 보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