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씨의 태백산맥을 읽고 흉내를 내봄^

 

불빛이 어스름하게 초가집을 비추었다.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뒤섞인 산중은 어렴풋하게 은은한 자연의 향기를 뿜어내었다. 나무와 나무의 이음새에 우물보다 깊은 공동이 허무하게 그 자태를 드러냈다.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뻐꾸기의 소리는 그 소리의 색채가 시나브로 진해짐을 느꼈고, 담연하면서도 음습한 이명이 환등기의 점진적인 광학적 강렬함처럼 귀를 환각의 소묘로 이끌어나감을 감각할 수 있었다.

어둠이 거대한 그림자처럼 전체를 감싸 안았고, 판자로 평평하게 지은 집은 어둠의 병풍 안에서 조용한 고요로서 존재했다.

달은 희끄무레하게 어둠의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빛났다. 달의 노란 빛과 비교하자면 이 세계는 하나의 사영(射影)에 지나지 않았다. 이 세계는 영원한 반복 속에서 나타나는 차이였고, 회귀와 함께 모사되는 환영이었다. 더 나아가 복잡한 자연의 합성이 조응이라는 합법칙적인 유위로서 변전하는 세계였다. 그렇다면 자연은 완전한 절대적 무위로서, 공(空)으로서 세계 내에 현전할 수 없는가? 만일 이 세계가 시뮬라크르의 차이로써 나타나는 반복이라면, 그 공동, 그 이음새의 공동에 절대적 무가 엄존할 수 없는가? 그는 미래에 궁극적으로 귀결될 그것, 그리고 고대에 이미 규정되어있던 그것, 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기 위한 진리의 가교를 구축하려고 이곳에 들어왔다. 이 관념적인 일련의 모종이 완성된다면 그로서는 현재의 진실을 자명성 있게 뚜렷이 응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고해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는 중이 되기 위해 이 초가집에 들어왔다. 그는 법명도 하사받지 않고 미발지중 즉 스스로 머리를 깎고 이 험준한 설악산에 판잣집을 만든 것이었다.

이 추위, 고지는 항상 그렇듯 추위와 함께한다. 빽빽한 나무들, 끝없이 펼쳐진 이름 모를 산맥의 연쇄, 밤중에도 걸려있는 서글픈 안개, 그리고 이미 잘려나가 추억에 대해서는 불구가 되어버린 반추적인 기능. 그렇다. 그는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세속과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인 일들 즉 은둔적인 현자가 되기 위한 병적인 노력을 시도하기까지 그는 많은 비애를 경험했다. 그리고 늙어버린 지금에서는 돌이켜보건대, 세속도, 은자로서의 삶도 무의미함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의미함도 결국 의미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가? 무의미함도 궁극적으로는 의미의 논리에 완전히 결박당한 채 그 숨결을 뿜어내지 않는가? 이것이 그가 이 험악한 산맥에 입산한 이유이다.

뻐꾸기는 둥지 위에서 요란하게 운다. 이 어둠이 이 우는 소리 안에서 그물처럼 퍼지는 공명과 함께하면, 비로소 밤은 그 은연하고 더없이 탁마된 시간의 자태를 우리의 앞에, 무섭도록 허무한 무가치함과 더불어 인간의 필연적인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혼자서 산악을 하면 길을 잃기 쉽다. 높은 곳에서 점점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나무들의 울창함을 바라보노라면, 이 미궁에 빠진 자신이 백 개의 시선을 가진 공포의 눈초리에 사로잡힌다. 고지에서는 기분 나쁘게도 어둠이 금방 시계(視界)를 무궁하게 감싼다. 오로지 은둔에서의 도야(陶冶)라지만, 어느 현자도 설악산을 중심으로 둘러싼 산맥, 영원히 대지를 둘러싸고 있는 장엄하면서도 무자비한 강원도의 대자연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산맥을 이길 수는 없다. 다만 거기에 합일하는 바, 즉 적응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일견 을씨년스럽고 거침없이 육박하는 어둠. 숨을 가파르게 내쉬거나 소리를 질러도 설악산과 이 산을 둘러싼 많은 산맥들은 마치, 그가 사회에서 살아가는 기계로써 무의미하게 저항했지만, (되돌려 받는 것과 일련의 가치의 창출, 점진적인 진보 같은 것)들의 실종됨을 초록색과 희색의 매무새로 암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역시 완전히 비문명적인 세계로 도약한 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많은 짐승들은 총의 서슬 아래 제거되었고, 그는 그 부문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안전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때에 맞춰 하산하여 시내로 가 여러 가지 재화들을 구해야 했다. 그가 야생에 목표를 두었다면 차라리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스스로 그러함, 곧 자연이요, 오에서 벗어나는 절대적인 진의 세계였다.

안개는 점차 희뿌옅게 한곳으로 뭉치다가 산맥 전체로, 만화(萬化)같이 신비스럽게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