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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고래」거대한 흡입력, 압도적인 크기

「고래」를 만나는 시간은 그야말로 무아지경이었다. 단 한순간도 책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다음 장, 다음 장만을 바라보고 단숨에 읽어나갔다. 447페이지에 달하는 장편 소설을 냉수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마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이 소설에는 거대한 흡입력이 있었다. 무언가에 몰입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즐겁고 활기찬 일인지.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온몸의 혈관에서 태동하는 느낌이란!

일생을 불행으로 살다가 죽어서 저주를 뿌리고 다니는 국밥집 노파, 타고난 여걸로 태어나 남자로 바뀌어가는 금복, 120kg 거구에 통뼈를 지니고 벙어리로 어리둥절한 삶을 살다 '붉은 벽돌의 여왕'이라는 전설이 된 춘희. 이 여인 3대의(노파는 혈연 관계가 아니지만)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취할 수 있는 흥분된 물줄기를 뿜어냈고 그것은 정말이지 거대한 크기였다.

천명관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몸속엔 할머니의 유전자가 남아 흐른다. 생명은 결국 그렇게 이어지는 법이다. 나의 육체 안엔 지난 세기 위대했던 작가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야기 또한 그렇게 시간을 가로지르며 생명을 연장해간다."

「고래」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는 매우 다양하다. 이 소설이 정말 '문학상'을 받은 게 맞나 싶을정도로 온갖 판타지적인 이야기가 가득 들어 차 있다. 코끼리와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등에 올라타 하늘로 날아오르는 신화적 요소가 있고, 죽어서 저주를 뿌리고 다니는 오컬트적인 요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무협지에서나 나올법한 벌떼를 자유자재로 부리며 몰고다니는 애꾸 여자도 등장한다. 이쯤되면 드래곤 볼을 모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참 심사위원들이 용캐도 선정했구만.

심사위원 은희경 작가는 이런 심사평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작가는 전통적 소설 학습이나 동시대의 소설작품에 ？G진 게 별로 없는 듯하다."

그도 그럴것이 천명관 작가는 「고래」에 별다른 개연성을 부과하지 않았다. 4년전에 한 성관계를 통해 임신을 하는가하면 지붕이 무너져 말그대로 돈벼락을 맞아 벼락부자가 되기도 한다. 이는 기존의 작가들이 닦아놓은 소설의 틀과 기초를 염두하지 않은 전개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천명관 작가의 뚜렷한 특징은 또 한 가지 있다. 많은 문장가들이 한입으로 주장하는 "문장을 짧게 끊어라." 라는 법칙을 전혀 지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곳곳에 호흡이 굉장히 긴 문장을 구사하면서도 불편하기는커녕, 마치 자진모리 장단에 맞추어 입담을 과시하듯 흥이 돋는다.

이날 쏟아진 구호들 가운데, '벽돌을 못 쓰게 죄다 깨트려버립시다!'나, '가마를 부숴버립시다!' 혹은 '공장에 불을 질러버립시다!'와 같은 주장은 잔뜩 화가 난 일꾼들 사이에서 일견 나올 법한 얘기였지만 어디선가 튀어나온 '파쇼에게 죽음을! 노동자에게 생존권을!'이나 '재벌독재 타도하여 노동자 천국 이룩하자!'와 같은 구호는 산골짜기에 있는 벽돌공장에서 써먹기엔 다소 유난스런 감이 없지 않았으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나 '수령님의 영도 따라 미제를 박살내자!'와 같은 구호는 다소 수상한 감이 없지 않은데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벽돌공장 웬 ㅁ라이냐!'나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독재 물러가라!'와 같은 구호는 다소 때 이른 감이 없지 않았는데, 또 어디선가 느닷없이 튀어나온, '영숙아, 사랑해!'나, '씹할 그때 홍싸리를 먹는건데'와 같은 소리는 그야말로 구호도 아니고 뭣도 아닌, 분위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 내지른 잡소리에 불과했다 아니할 수 없다.

P. 453

천명관 작가가 이토록 다른 작가와는 다른 이야기, 문체를 구사하는 건 그의 삶이 배경이 됐다. 보통의 작가들과 같이 글재주를 자랑하며 일찌감치 등단한 '순수한' 작가들과는 사뭇 다른 궤적을 그려왔던 것이다. 다방과 당구장을 전전하던 고졸 백수의 10대부터, 골프 가게 점원과 보험외판원으로 일하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20대, 영화판에서 온갖 ？？은일을 마다하지 않던 영화감독 지망생의 30대, 실패를 자인하고 영화판을 떠난 뒤 동생의 권유로 쓰게 된 단편과 장편 소설이 연달아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문단을 뒤흔들었던 소살가의 40대에 이르기까지.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작가로서의 행보가 이렇게 매력적인 이야기와 문체를 낳았던 것이다.

이렇게 「고래」는 기존의 '순수한' 문학과는 차이가 있다. 읽고 난 후에 한 마디로 정립할 수 없는 '그래서 어쩌라고?' 식의 문답도 피할 수 없는 파도다. 작가는 이런 답변을 한다. '현실이 이미 거대한 허구가 된 마당에, 이제 소설이 현실을 포착해내는 것은 불가능 할지라도'.

이건 그의 소설관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느냐'에 집중한 게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에 집중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에서 느껴지는 놀라운 흡입의 이야기와 능수능란하고 유머러스한 문체를 바라보면 그가 어떻게 말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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