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잽」인생의 사각에서 펼쳐지는 유쾌한 풋워크
23살 때 대학 후배 중에 무척이나 좋아하는 동갑내기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바둑을 인생에 빗대어 단편 소설 한 편을 썼었고, 난 마치 마음 속 대마를 잡힌 듯 그여자에게 사로잡혀 수없이 수작을 부렸다. 아쉽게도 사귄지 1년을 못채우고 헤어지고 말았다.
요즘 인기 절정의 만화, 윤태호 작가의 미생을 보며 그 여자가 떠오른다. 그리고 인생의 축소판들을 생각한다. 권투도 그 중 하나다. 사각의 링에는 오로지 나뿐이다. 링 밖에는 가끔 윽박지르거나 부은 눈을 식혀 줄 조언자들이 있다. 때때로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기도 하지만 링 안으로 수건을 던지기도 한다. 승부는 길고 길다. 세상을 향해 툭툭 잽을 날릴 것인가 좋은 싫든 끈적하고 땀내나는 상대의 몸을 껴안아 홀딩할 것인가.
나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었던 것일까? 상대방의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고 피투성이가 될 ？？까지 끝없이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가져오듯 가볍게 잽을 날릴 수 있는 인간? 아니면 싫든 좋든 무작정 상대를 끌어안는 인간?
P. 27
잽은 김언수가 등단한지 11년만에 펴내는 단편 소실집의 표제작이다. 학교라는 작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고생이, 권투를 통해 세상과 거리는 벌리고 끌어안는 법을 배운다. 자신만의 리듬을 타며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풋워크를 배운다. 주인공 남고생은 이미 세상에게 잽 몇 대를 얻어 맞았다. 유도부 녀석이든, 담임이든, 실리카겔(남고생 뺨을 때린 윤리 선생)이든,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동상이든. 그는 분명 툭툭 얻어맞고 화가 나 있다.
남고생은 마치 록키의 포스터에 나오는 광대뼈의 사내처럼 그 누구도 때리고 싶지 않은 얼굴로, 하지만 상대편이 때리므로 어쩔 수 없이 자신도 주먹을 뻗을 수밖에 없다.
링이건 세상이건 안전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지. 그래서 잽이 중요한 거야. 툭툭, 잽을 날려 네가 밀어낸 공간만큼만 안전해지는 거지. 거기가 싸움의 시작이야.
P. 26
김언수가 말하는 세상은 툭툭 날리는 잽이든, 공격하지 못하도록 끌어안는 홀딩이든 만만치 않아 주눅이 들기도 한다. 다만, 마치 15톤 대형 활어 트럭만큼 탄탄한 기본기의 풋워크를 들여다보면 중요한 건 세상이 아니라 나의 리듬이란 생각에 유쾌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토요일마다 학교에 나가 테니스장 청소를 계속했다. 실리카겔 때문도, 반성문 때문도, 오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매일 저녁 운동화 끈을 묶고, 호흡을 맞춰 강둑을 달리고, 거울을 보며 잽과 어퍼컷을 날렸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에는 도서관에서 낡아빠진 세계문학전집을 읽다가 선생들이 사라지면 테니스장을 청소했다.
P. 30
김언수의 단편 소설집 「잽」은 주인공의 나이 순서대로 묶여있다. 마치 주인공이 점차 나이를 먹으며 이야기와 같이 성장하듯 시간적 흐름의 재미를 맛볼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연령대에서 부딪칠 수 있는 삶의 면면들을 자세히 살펴보며 앞으로의 인생을 미리 체감하는 기분마저 든다. 「캐비닛」과 「설계자들」에 이은 김언수의 단편 소설집 「잽」은 유쾌한 리듬을 따라 흘러가는 인생 이야기의 작은 교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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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너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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