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허물어진 진실 속에서 찾는 해답

  어떤 사건, 특히 역사를 배울 때 이야기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 그와 관련된 것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해서 알아간다면 그 설득력은 배 이상이 된다. 어제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 준 근현대사 주요 사건의 연표는 기억나지 않아도, 어렸을 때 엄마가 해준 재밌는 이야기는 기억하는 법이다. 반 세기가 지나 기억 속에서도 허물어진 노근리 학살사건이 「나흘」이라는 이야기로 마음 속에 꽃을 피우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미 나의 세대만 하더라도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어쩌다 그런 일이 생긴 것인지, 「나흘」은 그 나흘동안 벌어진 일을 되짚어보며 천천히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아다닌다. 

 낡고 쇠락한 이 다리가 이야기로 은성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좋아하던 노인들이 정작 숨긴 이야기가 있다. 나는 그걸 알아내야만 한다. 

P. 31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작가 김진경이 고향에 돌아오며 시작한다.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노근리 학살사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라는 국장의 지시 때문에 어거지로 귀향한 것이다. 김진경은 노근리사건을 취재하는 한편, 자신을 낳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되면서 노근리 쌍굴에서 일어난 숨겨진 진실에 다가가게 된다. 

 노근리 학살사건은 양민과 인민군을 구별하지 못한 미군에 의해 벌어진 참극이다. 이걸 과연 미군의 잘못이라고만 단정지을 수 있을까? 애초에 전쟁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가능한 일일까? 만약 당신이 미군이었으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인민군이 몰살 당하고 양민이 살아남았을 수도 있다. 그들은 그냥 하나의 선택지에 해당되어 있던 죄밖에 없다.

 인민군과 양민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실, 무기와 평화를 반으로 가르지 못하는 세상, 진실과 거짓이 한 줄기가 되어 피어나는 꽃. 이것들이 전부 이 이야기를 읽으며 느낀 주제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 김진경이 비극이라는 진실을 찾아 헤매는 모습은 우리와 너무 흡사하다. 우린 답이 정해지지 않은 세상에서 답을 찾으려 하염없이 뛰고 넘어지고 있다. 노근리 학살사건의 '나흘'을 이미 알 게 된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 비극을 폐가같은 가슴 한 켠 구석에 밀어놓고 잊지만 말아야지 하고 모셔두어야겠지만, 어쩌면 진실은 굳이 반드시 찾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상은 답이 주어진 수학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이야기를 만드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배고픈 골방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