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애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 어릴적만 하더라도 어린이들의 꿈은 과학자와 제트기 조종사가 단골 손님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어린 아이들의 생각은 다 비슷비슷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어가며 우리는 눈 앞에 고장난 가로등처럼 놓여진 현실에 어떻게 변했을까. 산타 할아버지가 존재하던 꿈 속에선 모든 일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선물을 들고 들어올 굴뚝 마저 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특별한 사람이 될 거라 여겼던 어렸을 때와는 달리 보통만큼이라는 목표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현실은 얼마전에 불었던 공무원 취직 열풍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공무원을 꿈으로 간직한 소년, 소녀가 과연 있었을까?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어떻게든 시간을 때우며 주어진 일만 적당히 처리하는 일, 정말 상상만해도 짜릿하고 아찔한 직업이지 않아? 이런 생각을 했던 아이는 아마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을 것이다. 무한 경쟁이라는 세상과 마주하며 적당히 성장한 우리들은 안정과 평범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건 어쩌면 세상에 대해, 주인도 모르고 혀를 내밀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멍청한 일일수도 있다. 이건 하나의 패배다. 그리고 그 패배감과 오롯이 적대한 남자가 있다. 그게 바로 「침대」의 또 다른 주인공 맬컴이다.

"(중략) 사람들은 그냥 더 저렇게 살아."

"승자가 따로 없단 말이지? 젠장, 나한테는 죄다 개 풀 뜯는 소리로 들려. 왜 사람들은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계획에 집착할까? 만일 어른들이 근심 걱정없이 산다면 나도 그런 계획을 수긍할 수 있어. 개인적인 비극을 겪지도, 직장에서 괴로움을 당하지도 않는다면 말이야. 하지만 그렇지 않잖아? 그런데 왜 대부분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뿐인 그런 일을 하지 못해 안달인 거야? 내게 이건 굴욕이나 다름없어."

P. 98

맬컴은 어릴 때부터 지붕 위의 텔레비전 안테나에 알몸으로 매달려 있는다든지 극장에서 슬그머니 옷을 하나씩 벗는다든지 하는 괴팍한 행동을 일삼았다. 그는 무엇이든 가장 처음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그에 반해 맬컴의 동생, <나>는 평범한 인물이다. 언제나 형의 그늘에 가려져있고 평생 자기 이름보다 '맬컴의 동생'으로 더 많이 불리는 인물이다. 맬컴은 현실과 특별함의 간격에서 요동치다 결국 스물 다섯 살 생일에 자기 침대로 기어 들어가 20년동안 나오지 않는다. 맬컴이 느낀 굴욕. 그리고 맬컴의 동생인 <나>가 바라보는 형과 세상. 이야기는 이 두 가지 요소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마라톤과 같이 골인 지점을 향해 달린다.

꼬박 이십 년을 침대에서 보낸 형. 우리 가족이 살 길은 형이 한시라도 빨리 죽는 것 뿐이다. 형은 가족 모두의 삶을 망가뜨린 장본인이다. 지금 나는 그런 형과 다시 한방에서 지내고 있다. 방에서 우리의 험난한 삶은 시작되었다. 적어도 이 방의 일부에서. 언젠가 아버지는 말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P.11

재밌게도 소설안의 맬컴의 동생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굉장히 상투적이고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소설 안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노출시키지 않는 건 흥미로운 퍼즐 조각이기도 하다. 굳이 특별한 특징이나 느낌을 줄 수 없는 이름을 설정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평범한 이름을 붙여도 이상할게 없는 그런 인물이 바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작가 데이비드 화이트 하우스는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신예 작가다. 게다가 「침대」가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호기심과 긴장의 끈을 적당히 쥐어틀고 있으며 독자들을 짊어지고 간다. 사실 그는 저널리스트 출신의 작가이기 때문에 약간의 불안감 같은 게 있었다. 지금까지 읽어 본 저널리스트 출신의 작가들의 소설은 문체가 지극히 딱딱하고 이야기에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느껴 많은 실망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과도하게 많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풍부한 표현과 묘사를 사용해 불신을 일순간에 날려버렸다.

"필, 너 달리기 빨라?"

크리스가 물었다. 내 이름은 필이 아니었다. 녀석이 잘못 알고 있었다. "난 필이 아니야." 라는 말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순간, 나는 녀석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잘못 불린 뒤 이어지는 몇 초를 어떻게 참아 넘기는가는 그 사람의 인성을 시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P. 69

인생의 골인 지점에는 과연 뭐가 있을까? 우린 이상하게도 '골'이라는 곳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있지만 과연 그곳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아마도 각자의 이상과 현실이 있겠지만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는 「침대」를 통해 사랑과 행복이라는 '골'을 말하고 있다. 특별함과 평범함, 꿈과 현실 그리고 가족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한테 거대한 상상력을 선물한다.

"형이 우리 가족을 망가뜨렸어."

"아니야. 내가 구원한 거야."
나는 형의 이마에 내 이마를 갖다 댄다.

"매서운 겨울 폭풍이 불 때 황제펭귄들은 체온 유지를 위해 함께 뭉쳐 있지. 고대 로마의 군단병들이 하던 것과 똑같은 자세를 취하는 거야. 녀석들은 차례로 돌아가며 위치를 바꾸지. 외부에 있던 펭귄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가면, 대신 안쪽에서 몸을 따뜻하게 덮힌 펭귄들이 그들의 자리로 가는 거야.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임시로 호송 행렬을 이끄는 것처럼 말이야. 펭귄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게 가족을 위한 최선이기 때문이야."

 P.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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