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파탈' 이라는 단어는 이제 우리에게 비교적 대중적이 되었지만, 내가 그 단어를 처음 들었던 건 20살때 쯤이었고, 그 명확한 의미를 이해한 건 20대 중반, 히가시노 게이고의 '환야' 와 '백야행' 을 읽고 난 뒤였다. 그냥, 남자를 죽음으로 이끌만큼 치명적인 매력의 여자를 뜻한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쌍둥이처럼 닮아있는 그 두 작품에서는 단순히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것 뿐이 아니라, 자신의 그 매력을 이용해서 남자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이 두 작품의 여주인공들은 '내가 뭘 어쨌길래?' 와 같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빠진 남자들을 '활용' 한다.

 

 서사극에서는 이미 상당한 반열에 오른 일본의 여류작가 요시다 아키미의 만화 [길상천녀] 또한 팜므파탈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그려낸 작품이다.

 

 고등학교 2학년에 된 단짝친구 유이코와 마리. 새학기가 시작하자 마자 그 둘은 '카노 사요코' 라는 전학생을 만나게 된다.

 

 

 남자는 물론 동성인 여자까지 반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 소녀 카노. 당연히 학교에서 난다긴다 하는 남학생들 또한 가슴 설레게 만든다. 같은 반 남학생 '토노 료' 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그녀를 멀리하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토노가家와 카노가家 사이의 재산 문제가 얽히면서 료의 사촌인 3학년 '아키라' 는 어떻게든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열일곱살의 소녀 카노 사요코. 그녀의 주위에서 사건들이 하나씩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시작한다.

 

 

 

 

 

토노 료는 짐승같은 남자다. 여기서 말하는 짐승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자를 밝히는 남자라는 의미의 짐승이 아니라, 마치 야생동물처럼 오감이 날카롭게 벼려진 남자를 말한다.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포식자들과 경쟁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혹독한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 그렇기에 오히려 또래 남자들이 갖고있지 못한 남성스러운 매력으로 학교의 많은 여학생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만든다.

 그러한 토노 료에게 - 검은 생머리에 이질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외모의- 전학생 카노 사요코는 흡사 자신보다 훨씬 강한, 백수의 왕 정도로 보여졌을 것이다. 자신보다 압도적인.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정글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맹수.

 

  경외-

토노 료가 카노 사요코에게 느낀 감정은 그것에 가까웠을터다.

실제로 카노 사요코의 강함을 알아채지 못한 수컷들은 그녀의 손 밑에서 처절하게 무너져간다. 카노 사요코의 본색을 보며, 토노 료는 공포감에 가까운 느낌까지 갖게 된다.

 

 

그리고, 토노 료와 비슷한 또 한명의 남자, '오가와 유키마사'.
그는 카노 사요코를 보자마자 - 심지어 고작 일곱살이었던 그녀를 보자마자 빠져들고, 연인이 아닌, 충직한 심복이 되고 만다.

 

 작품속에서 카노 사요코를 보는 모든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그녀와 동성인 여성들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에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리더로 '떠받든다'. 여성들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마력을 단박에 알아채고, 오히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기질에 자연스럽게 순종한다. 질투조차 할 수 없는 완벽한 매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조금 다른 느낌을 갖는다.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위화감이 있는데, 먼저 토노 료와 오가와 유키마사 같은 소수의 부류는 그런 그녀의 아름다움에 경외심을 갖게되고 복종하거나 피한다. 그 아름다움에 치명적인 독이 숨겨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것이다. 토노 료는 그녀를 의식적으로 피하려 하고, 오가와 유키마사는 굴복하는 것을 택한다.

 

 

 

 

 

 

 

한편, 토노 아키라와 같은 스스로를 강하다고 믿는 남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그녀를 굴복시키려 한다. 그 또한 카노 사요코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지만, 자기 그릇의 크기를 알아채지 못한다. 단순히 그녀가 '여자' 라는 이유로, '치명적이래봤자, 난 남자. 너보다 강하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토노 아키라는 억지로 그녀를 자신의 발 아래 꿇리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 [길상천녀] 의 이야깃꾼 역할을 맡은 아사이 타카시는 그녀 가지고 있는 매력을 신비함으로 단정짓고 멀리서 방관하는 쪽에서 자리잡는다. 즉, '나와는 다른 종족' 이라고 선을 긋는다고 할까. 그녀와의 관계에 본인의 의지로 끼어들지 못하고 다가서지도 못한다. 이렇게 세 부류의 남자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카노 사요코를 중심으로 절묘한 균형을 이뤄내며, 처음부터 끝까지 위태위태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안정적으로 완결되어진다.

 

 

 

 또한 작품 전반에 흐르는 남성과 여성의 대립이라는 조금은 불편한 설정들 또한 긴장감을 유지한채 고고하게 흘러간다.

 특히 사요코의 가문인 '카노' 와 료와 아키라의 가문인 '토노'.

 지역 유지이기도 한 이 두 가문은 현재 서로의 이권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토노가문은 건축을 기반으로 발전한 기업을 소유하고 있다. 지역의 관공서와 학교들을 독점적으로 수주하면서 단시간에 크게 발전했을 것이다.

 그 중 아키라는 토노 가문의 장남 - 즉, 기업의 제1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남자의 아들이고, 료는 일찍 죽은 차남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사촌지간이지만 료는 사실상 큰아버지 - 아키라의 집에 얹혀 지내는 셈인 것이다.

 

 게다가 꾸준히 병원비를 지출해야하는 여동생까지 있어서 료는 큰아버지와 사촌형 아키라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누르고 조심하며 지내왔던 것이다.

 한편, 카노가는 토노가문보다 오랫동안 지역의 유지였던 토박이 지주 출신으로써 지역의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토노가는 새로운 건축물을 올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땅을 소유해야 한다. 때문에 토노가는 카노가와 정략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는 카노가 또한 토노가의 현 상황을 이용해 가계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이 두 가문은 이러한 경제적 대립 뿐 아니라 가풍에서도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카노가는 대대로 '무녀' 를 배출한 집안으로 집안의 중심은 언제나 여성이 되었다. 자연스레 여존남비의 가풍이 세워졌고, 반면 토노가는 기반하고 있는 족벌식의 사업 특성상 남존여비의 가풍이 굳어졌던 것이다. 이 두 가문의 대립, 나아가 토노 아키라와 카노 사요코의 대립은 남성과 여성의 대결이라는 일종의 성대결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위에 언급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 환야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백야행과 환야의 두배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카노 사요코와 오가와 유키마사 각각 백야행의 '유키호' 와 '료지' 를 닮아있다. 어찌보면 이러한 이야기 구조의 흡사함은 팜므파탈 스토리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구조 - 클리셰에 기인하지만, 확실히 [길상천녀] 는 여류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정묘사가 훨씬 더 돋보인다.

남성작가들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얽히고 설키는 감정의 실타래들이 놀라울정도로 또렷하고 섬세하게 묘사되고, 기교 없이 수수한 작가의 그림체가 어우러져 보다 풍부하면서도 깔끔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야기의 복선이나 인과관계, 등장인물을의 캐릭터를 풀어내는 과정 또한 설득력있고 매우 세련되었다.

 

 

 

 

 

압도적인 마력의 카노 사요코.

그녀를 만난다면, 과연 나는, 그리고 당신은 어떤 반응을 취하게 될까?

 

아마도 난, 깊이 빠져 정신없이 허우적 댈 것이다.

죽어가고 있는줄도 모르는 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