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는순간 가슴이 턱 하고 막혀왔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나라가, 이렇구나. 이렇게 불합리하구나. 이렇게 비상식적이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으며 살아가고 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의 고통을 모른체 하고 살고있구나.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구나.

그런것들이 목구멍위로 울컥 치솟아, 숨통을 꽉 메웠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서유진과 강인호는 두사람이지만, 한사람이다. 두개의 영혼이지만, 한 사람의 영혼이고, 각각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른 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선한 면이 있다(고 믿고 있다). 한 사람이 완벽한 타인에게 갖는 동정심이나 가엾게 여기는 모습들이 그 증거일터다. 그 선한 면에는 바로 '정의'가 자리잡고 있다. 약한사람이 강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는 모습에 분노하기도 한다. 그것을 '정의감' 이라고 하자. 하지만, 또한 인간은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부분을 말하자면, 그것은 한 인간의 기억을 바꾸기도 하고, 스스로를 죽이는 방법을 택할 정도이기도 하다.   

 

이 작품 속에서는 인간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에서 피라미드의 가장 아랫부분. 그 아랫부분에서 가장 낮은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계층들이 등장한다. '돈'.'출신'이라는 '운'이 만들어낸 피라미드. 원치 않았지만 청각 장애인이 되었으며, 아직 나이도 어린 미성년자인. 게다가 집안도 찢어지게 가난해서 국가의 원조가 없으면 교육 받기는 커녕, 숨조차 부지할 수 없는 아이들. 농아 교육기관인 '자애학원' 에 기거하고 있는 아이들이다.

 

사업에 실패한 뒤, 6개월간 백수생활을 청산한 강인호는 부인의 친구 덕에 사립 자애학원에 기간제 교사로 들어가게 된다. 비록 기간제 교사로 들어갔지만, 강인호는 '자애원' 이라는 기숙사를 겸하고 있는 자애학원에서 밤마다 장애아들을 대상으로 끔찍하고 더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집단 구타, 미성년자 성폭행, 성추행. 강인호는 대학시절 선배이기도 했던 무진시 인권보호센터의 서유진과 함께 자애학원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험난한 투쟁을 시작한다.

 

정의로운 쪽과, 정의롭지 못한 쪽간의 투쟁은, 주류세력과 비주류세력간의 투쟁. 가진자과 못가진 자들의 투쟁. 힘있는 자들과 힘없는 자들의 투쟁이다. 딱 보기에도 답이 뻔한 투쟁이다. 한국의 법은 정의를 위한 법이 아니기때문이다. 아니, 한국의 법은 정의를 위한 법일지라도, 법을 '이용'  할 수 있는 자들은 주류세력. 가진자. 힘있는 자들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갖 것들을 다 이용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랄 수 있는 '연줄' . 그리고 '돈'. 정의는 법을 통해 결정되지 않는다. 바로 그것들이 대변하는 '힘' 으로 결정된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좋은 나라 아닌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그지 같을 줄은 몰랐어. 우리 많이 힘든 싸움을 해야할 것 같아. 교육청, 시청, 다 얽혔어. 무진여고 무진고, 아니면 초등학교 아니면 처조카 아니면 무사모, 아니면 영광 제일교회..... 인호야. 글쎄 사십억이야, 사십억! 그 인간들이 우리 세금 일년에 사십억 가져다가 그런 짓을 한거야. 예산 감시하는 시의회에 진정하러 가려고 남자 간사 보냈더니 허탕치고 왔어. 시의원들 몇명이 성폭행으로 성추행으로 입건된 상황이래. 것두 한 놈은 엘리베이터걸을 추행한 혐의야. 엘리베이터안에서..... 너무 코미디 아니니? 우리 여기서 딸 키우고 살아야 하는 거지? 이 발정난 나라에서. 응?             P. 131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의롭다. 그리고, 대부분 고통스럽다. 그리고, 대부분 외롭다.

여기에서 인간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위에 언급했듯, 인간은 고통에 지나치게 약하다. 아니, 인간이란 원래가 지나치게 연약한 생물인지도 모른다.

정의롭고싶지만, 고통스럽다. 고통을 피하고 싶지만, 정의롭지 못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서유진' 은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는 인물이다. 바다와 하늘이라는 두 딸이 있는 이혼녀에 하늘이는 선천적으로 심장에 기형이 있어 병원을 집보다 더 드나들고, 밥보다 약과 링겔을 더 먹어야 하는 어린 아이이다. 인호로부터 '너무 옳아서 무서웠다'는 평을 들은 서유진은, 어머니였기에 강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딸 중 한명인 하늘이는 평생 고통을 이고 살아야 한다는 자책감때문에,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발정난 나라에서 딸들을 지켜줄 사람은 어머니인 자신뿐이라고 생각했기에 강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너무 궁금했다.

 

왜 세상에서는 착한 사람이 맞고 고문당하고 벌받고 그리고 비참하게 죽어가나? 그럼 이 세상은 벌써 지옥이 아닐까? 대체 누가 이 질문에 대답해 줄 것인가? ........... 그 사람이 모두 그랬던가. 열심히 공부하고 그래서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라고.  그런데 얼마전, 자애학원 사건을 접하면서 나는 깨닫게 된 거야. 어른이 되면 그 대답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되면 그 질문을 잊고 사는 것이라고 말이야. 이제 나는 정말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뭐랄까, 우리의 삶이 그냥 먹고 싸는 것, 돈을 모으고 옷을 사고 하는 그 너머의 무엇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나는 확인하고 싶어. 그렇지 않다면 살아가는 걸 견딜 수 없을 거 같아. P. 227

 

이런 생각을 모두가 다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안타까운 점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 세상이 벌써 지옥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끊임없이 고통을 회피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내게 직장이 있는 한, 꼬박꼬박 모을 수 있는 월급이 있는 한, 가족이라는 보금자리가 있는 한, 등 댈 방이라도 있는 한, 이 세상은 지옥은 아니라며.

 

서유진과 달리 강인호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강자를 알아볼 줄 알고, 그 앞에서 자신의 모욕을 감내할 수 있는 남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남편이자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와 자식을 위해 자신을 낮출 줄 알았고, 굴욕을 감내할 줄 아는 남자였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좋은 남편이었고, 좋은 아버지였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갈등할 수 밖에 없었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가족을 희생해야 했다. 서유진과 강인호는 사회정의에 대해 공감했지만, 강인호는 이미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족역시??신이 가족을 떠나는 순간, 자신의 가족 역시 사회에서 소외당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혼녀인 서유진이 그랬던 것처럼.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더이상 떨어질 데 없는 무진이라는 도시까지 흘러들어왔던 것처럼. 그는 그렇게 항변한다.

 

서선배, 나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나름대로 비겁했기에 별탈없이 대학 마쳤고, 별탈없이 살아왔어. 서선배, 그 청렴하시고 올바르시기로 유명했던 서목사님 돌아가시고 가난때문에 힘겨웠다고 했지? 난 모르겠어. 나 하나라면 싸울 수도 있겠지. 그러나 우리 새미....내 알량한 정의 지키자고 우리 새미 불쌍하고 불행하게 만들 용기가 내겐 없어. P. 262

 

하지만, 사람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편모라는 가정환경때문도 아니고, 가난때문만은 아니다.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불쌍하고 불행한 성폭력 피해를 당한 청각 장애 아이들. 그들이 청각장애인이어서 불쌍하고 불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힘없는 미성년자이고, 가난에 찌든 저소득층 부모밑에서 태어났거나, 그런 부모조차 없기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혈안이었던 어른들. 단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어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어른들에 야합한 또다른 어른들. 그들의 더러움을 덮어주고, 감싸주고, 모른척 해준 수많은 다른 어른들 때문에 불행해진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삶과 죽음은 인류의 반 이상이 겪는 그 어쩔 수 없는 가난과 편모라는 핸디캡 속에서 내가 왜 귀하고 자랑스러운 사람인지, 그 이유가 되어주셨어. 아버지 때문에 나는 그냥 남루하고 그냥 불쌍한 편모슬하가 아니었다구. 내가 불쌍하고 불행한 적이 있다면 그건, 나도 가끔은 뻔히 아니라는 걸 알면서 그것과 타협하고 싶어질 때야. P. 266

 

이 글의 서두에 남자 주인공인 강인호와 여자 주인공인 서유진이 한 사람이라고 했었다.

서유진과 강인호의 이 대화는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두 마음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아마 독자 대부분이 그랬겠지만), 내가 강인호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강인호의 마음도 이해가 되고, 서유진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강인호의 대사에서 내 마음은 서유진이 되어 그를 설득했고, 서유진의 대사에서 내 마음은 강인호가 되어 그녀를 붙들었다.

 

이 작품과 더불어, 최근 큰 이슈가 되었던 인면수심의 성폭행범 조두순 사건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나영양 같은 피해자가 엄청나게 많다' 는 기사도 올라왔다. 많은 성폭행범이 지금 이 순간에도 법망의 허점을 이용해 집행유예등으로 풀려나, 또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심지어 형기를 마치고 나온 범죄자들도 재범률이 굉장히 높아, 성폭행 피해자들이 양산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들이었다. 장애여성들에 대한 성폭행 사례는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안타까운점은, 법이 피해자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폭력이건 피해자는 가해자를 잊지 못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가 사회적으로 약자에 속하는 여성이 대부분인 성폭력은 더더욱 그러하다. 법이라는 것은 단지 죄자를 벌주기 위한것이 아니어야 한다. 사람의 사회에서, 사람의 힘으로 범죄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최소한 약자를 보호해주는 역할만은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가 끊임없이 경각심을 갖고, 주변에 관심을 조금만 가져도 세상은 변해나갈 것이다.

세상과 타협해도 좋다. 사회에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타협은 필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타협해야 할 부분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부분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절대로 지켜내야만 하는 무언가를, 마음속에 단단히 세워야 한다.

마음속에 굳건히 세워진 그 무언가가 세상을 보는 눈이 되고, 귀가 될 것이다.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P. 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