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서른 한살 이라고 밝힌 캐시 H 는 올해로 11년째 간병사 일을 해온 베테랑 간병인이다.

그는 무척 유능한 간병인이었다. 그의 간병을 받은 '기증자' 들은 다른경우보다 빠른 회복을 보이곤 했고, 그 덕분에 캐시는 다른 간병인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는데, 바로 간병할 환자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캐시는 '헤일셤' 이라는 고립된 지역의 외딴 학교 출신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캐시는 자신이 평생 사랑하게 될,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도 않고, 아름다운 결말따위는 꿈도 꾸지 못할 동급생 '토미'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캐시는 자신이 아주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말한다.

지금은 폐교된 '헤일셤' 출신이라는 것 자체가 아주아주 운이 좋은 것이었음을, 뒤늦게서야 깨닫게 된다.

과연 캐시의 과거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헤일셤이 과연 어떤 학교였기에, 캐시는 행운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직 이 작품에 대해 조금의 정보라도 알지 못하는 독자라면, 여기서 제 서평을 읽는 것을 그만 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줄거리나 내용을 다 알고 봐도 아주 좋은 작품이지만, 전혀 모르는 경우에 훨씬 더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으실거에요.

 간단한 자기 소개부터 시작되는 1인칭 시점의 이 담담하고도 격렬한 소설은, 그 대부분이 회상으로 이루어진 자전적 느낌을 물씬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또한, 이러한 방식의 서술법은 일종의 '가상역사' 물인 SF이지만, 보다 설득적으로 느껴진다.

 1950년대 이후 인류는 초고도로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공장기 배양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인공장기를 보다 완벽하게 배양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꼭 닮은 신체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들이 바로 '클론'.

우리가 이미 너무나 많은 영화와 이야기들을 통해 접한 바로 그 클론이다.

인공장기 배양을 위한 클론이라는 설정은 사실, 시험관 아기와 배아복제기술이 언급되던 그 시기부터 수많은 가설들과 함께 제기되어 왔고, 이를 위한 실험 자체가 유럽과 같은 기독교 국가에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논의가 되며 법적인 금제를 걸어놓고 있다.

최근 황우석 박사 팀이 성공시킨 복제기술로 생각해 봤을때, 만일 그러한 금제가 없었다면 실제로 이 소설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주로 캐시의 회상으로 이어져 나가는 이 작품은 사실 인간이라는 본질 자체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담담하게 풀어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히, 인간과 클론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 육체와 영혼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물음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캐시와 친구들에게 클론이라는 설정을 지워놓고, 기증이라는 결말 또한, 죽음으로 바꾸어 놓는다고 해도 이야기는 충분히 짜임새를 획득한다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이야기의 축은 주로 캐시와 루스, 그리고 토미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나간다.

그들이 과거에 헤일셤에 함께 겪어 나갔던 상황들을 통해 현재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 마음으로 이야기에 몰입되게 만들고, 그들이 장기배양을 위한 클론으로 길러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아주 작은 힌트들이 끊임없이 던져지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그리고, 토미에 대한 캐시의 마음. 루스와 토미가 맺고있는 애정의 삼각 관계에 대한 것들로 내러티브를 풍성하게 만들면서 이야기 전체를 풍부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중심은 꾸준하게 '이들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되는가?' 에 대한 대답으로 수렴되게 진행되어간다.

정말 엄청난 재능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를 벌리고 모으며, 유연하게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회상속의 회상, 과거 속의 과거로 파고드는 순간들이 절묘할 정도로 합이 딱딱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정서적인 표현도 대단히 훌륭해서, 배경과 인물, 대사와 묘사가 감정적으로 아주 잘 어우러진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이 이야기는 '기증' 이라는 결말을 앞에 두고 있는 '클론' 들의 이야기이다.

과연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모든 인간의 창조적인 활동은 이 질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곤 한다.

수많은 작가와 철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고민해왔고, 십중 팔구는 종교를 통해 해답을 도출해냈고, 나머지는 이도저도 아닌 매해하게 뭉뚱그린 대답을 낼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엄청난 대답에 보다 단순하게 도달하기 위한 많은 방법 중 하나는, 인간의 목표를 단순화 시키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여기서 시작해서, 저기로 가야 한다는 가정을 해 놓는다면, 여기서 저기로 가는 과정 속에서 본질-그 비슷한 것이라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모든 인간들에게는 동일하게 도착할 수 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종착역인 '죽음' 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캐시와 루스, 그리고 토미의 이야기는 인간의 삶 그 자체의 축소판인 것이다.

단, 한가지 다른 점은, 우리 인간은 신이 만들었고, 그들은 우리 인간이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들이 갖는 '근원자'에 대한 고민, 기증의 공포에 대한 의식적인 망각,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결국 인간의 삶에 대한 고민,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망각,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흡사하게 닮아있다.

결국 이 작품의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관망적인 시각을 포착해낸 것이다.

또한 클론들을 대하는 인간들의 모습 역시, 인간의 본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희에게 영혼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라도 있었느냐고?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구나. 얘야, 오래전 우리가 헤일셤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게 대부분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고 말이다. 그 이후 우리가 거둔 많은 발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으로 그런 견해가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단다.

p. 357"

"헤일셤 이전의 클론들은, 그저 의학 재료를 공급하기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단다.

시험관에 들어있는 베일에 싸인 물질로 말이야.

사람들은 너희 존재를 거북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더 큰 관심은 자기 자녀나 배우자, 부모 또는 친구를 암이나 심장병이나 운동 세포 질환에서 구하는 거였단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되도록 너희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너희가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지.

p. 360"

아마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가 인간 복제 실험에 대한 논의가 전 유럽에서 심도있게 진행되던 시기였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 치료와 연구를 위한 인간복제에 대한 찬반으로 시끄러웠고, 이 작품에서 나타난 것 처럼 생명에 대한 폭 넓은 방관의 자세가 인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이 나왔었다.

가끔 나도, 인간은 죽기위해 사는 것인가? 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곤 한다.

한때, 삶의 목적은 '잘 죽는 것' 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이 작품속에서 기증자들이 죽어가며 하는 것이 꼭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에 대한 회상이다.

하지만, 때로 그것은 날조된 회상이고, 만들어진 회상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만큼은 괴로웠던 기억들은 묻어두고, 만들어서라도 좋은 기억들을 회상하고자 한다.

추억이라고 부를만한 기억은 엄청난 고통을 이겨낼만한 저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 역시, 간병인을 그만두고 기증을 시작할 캐시의 '회상' 인 셈이다.

어쩌면, 한 인간의 본질은 결국 그 사람의 '기억' 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 본다.

과거에 받아온 교육, 친구들과의 교제, 타인과의 사랑, 보고 듣고 느끼면서 가져온 수 많은 '기억'의 조각들.

마치 치밀하게 짜여진 퍼즐처럼, 그런 조각들이 모여, ' 인간' 을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내가 죽어 육체는 먼지가 되어 사라지더라도, 잠시동안이나마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살아남게 되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영혼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정말, 언젠가는 클래식이라는 이름이 붙을만큼 좋은 작품임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