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소녀가 있다.

이제 겨우 19살이 되었지만, 그녀는 불법 난민이라는 신세에 불과하다. 단지 '살기위해' 고국 나이지리아에서 밀항을 통해 영국에 도달한 소녀. 소녀의 이름은 리틀 비.

리틀비의 마을은 평범하고 작은 아프리카의 한 지역에 불과했다. 단, 그 마을 지하에 검은 탐욕의 씨앗인 석유가 매장되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전까지 말이다. 리틀비의 마을은 순식간에 검은 황금은 석유를 쟁취하기 위한 전쟁터가 되고, 어린 리틀비는 자신과 함께 뛰어놀던 마을의 어린 아이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던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물론, 부모님들까지 무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단 하나뿐인 언니가 무자비하게 강간당하는 소리, 반쯤 미쳐서 죽여달라고 사정하는 소리, 그녀의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녀가 그런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이지리아를 떠나야만 했다. 단지 살기 위해서.

리틀비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었던 영국 여인 새라의 남편 앤드루가 떨어뜨린 지갑 안의 면허증을 손에 쥐고 영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남편 앤드루와의 어그러진 사이를 돌리기 위해 찾았던 나이지리아의 한 해변에서 새라는 자신의 중지 손가락 하나와, 어린 나이지리아 소녀 한명의 목숨을 바꾸었다. 그게 벌써 3년 전 일이다. '닉시' 라는 중견 잡지사의 편집장인 새라는 영국에서도 중상류층에 가까운 안정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는 능력있는 여성이자 엄마이자 아내였다. (아- 하지만, 능력있는 엄마와, 충실한 아내인지를 묻는다면 물음표를 띄워야 할지도 모른다.) 어느날 눈앞에 리틀비가 거짓말처럼 짠 하고 나타나기 전까지, 그리고, 그보다 사흘 전, 남편 앤드루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까지, 그녀에게는 '아주 큰' 문제는 없었고, 문제들은 언제든 풀릴 수 있을것만 같았다.

 

 

어쩌면, 사람의 삶에 필연이라는 것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인연이라는 것도 결과론에 입각한 말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리틀비와 새라의 만남은 완벽한 우연이었다. (그 만남이 결과적으로는 필연이었고, 인연이라고 말한다면 반박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리틀비가 나이지리아의 그 마을에서 태어났던 것도 우연이었고, 새라가 앤드루와 관계를 돌이키기 위해 선택한 국가가 나이지리아 였다는 것도 우연이었다. 우연과 우연 속에서 새라는 '선택'을 해야만 했고, 그 선택의 결과는 모두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었다. (물론, 그 결과를 의도하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말이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 아니던가?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 반드시 일어나고야 만다. 애써 피하려고 안달하지만, 반드시 찾아오고야 만다. 그것은 '필연' 이기 때문이다. 인과율이다. 당연한 업보. 당연히 감당해내야만 하는 짐.

 

나이지리아에서 새라와 그녀의 남편 앤드루가 맞닥뜨린 리틀비와 그녀의 언니 느키루카를 만난 순간부터 태엽은 돌아가고 있었다.

필연의 결과를 향한, 인과율에 대한, 업보에 합당한, 당연한 그 결과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이 묵직하기 짝이없는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참으로 예쁘고 앙증맞은 오렌지빛 문고판에 실려있다.  

홀수 챕터는 리틀비의 시점, 짝수 챕터는 새라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흘러나온다.

리틀비와 새라의 이야기가 현재와 회상이 교차적으로 흘러나오면서 마치 퍼즐조각처럼 현재와 과거가 차근차근 맞아 떨어져간다.

 

난민수용소에 갇힌채 2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 리틀비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첫 장부터, 나는 가슴이 먹먹해져 옴을 느낄 수 있었다.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감정을 느끼며, 힘들게 힘들게 한장 한장을 넘겨야 했다. 심지어 안구에 말 그대로 쓰나미가 한 번씩 후루룩 왔다 갈 정도로 리틀비의 독백은 처절하고 처절했고 처절하기만 했다.  

어디서나 자살할 방법을 가장 먼저 찾는 리틀비. 화장실, 수용소, 헛간, 창고, 침실, 심지어 새라의 집 마당과 주방, 공원에서도 가장 먼저 자살할 방법을 찾는 리틀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항상 죽음의 순간을 예비하고 있는 리틀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사는 것에도 나름 좋은 점이 있다.

일단 죽을 준비를 하고 나면 그렇게 두려움에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수용소에서 풀려난 그 날 아침, 나는 불안했지만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p.87'

 

 

이 이야기는 단순히 누군가 창조해 낸 소설이 아니다.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실제 아프리카에서 소년병으로 6살때부터 내전을 겪었던 이스마엘의 '집으로 가는 길' 이라는 르포를 읽은 적이있다. 6살때부터 총을 들고 동족을 쏴 죽였던 그는 나랑 동갑인 청년에 불과했다. 그는 정말 천운으로 미국에 정착할 수 있었지만, 많은 아프리카 난민들이 그런 행운을 얻는 것은 아니다.

리틀비의 이야기는 지금 이 시간, 이 순간 단지 '우연히' '거기서''태어났다' 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상상도 못할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의 이야기이다.

 

'우린 언제나 여기서 도망쳐야 하죠.

여기가 어디든 간에 거기서 달아나야 할 이유가 항상 있는 법이니까요. 그게 내 인생의 사연이죠.

언제나 평화로운 단 한순간도 없이, 달아나고 달아나고 또 달아나는 것.

때로 엄마와 아빠와 우리 느키루카 언니를 기억할 때면 나는 결국 죽은 자들과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언제나 달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P. 403'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고, 먹먹했다.

너무나 힘든 이야기이지만, 이것 또한 '현실' 이다. 우리가 심심해하고, 귀찮아하고, 권태로워하는 이 순간들처럼,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인 것이다.

 

난 아직도, 리틀비가 어떻게 웃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웃고, 웃고 또 웃었던 리틀비.

나도 너처럼 웃고, 웃고, 또 웃을 수 있을까?

 

 

'나는 찰리에게 미소를 보냈고 이제 나는 자유로울 수 없다 하더라도 이 아이는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 삶은 이제 이 아이의 마음속에서 고향을 찾는 것이다. 그건 슬픔이 아니었다. 내 심장은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난 생각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내 마음만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어. 더 이상 달아날 필요가 없는 마음.

세상 돈 전부를 합친 것보다 소중한 나의 마음. 그 마음의 진정한 고향은 바로 인간이야.

내밀하고 저항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바로 내 마음의 고향이었던거야.

나는 찰리에게 미소를 보냈고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의 희망이 한 사람의 영혼 속에서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알았다.

P. 410~411 '

 

리틀비, 크리스클리브, 아프리카난민, 나이지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