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했던 엄연하고 무거운 현실도,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져버립니다.

그 반대로, 존재하지 않았던 일도 일단 기록되어버리면 존재했던 것으로 착각되어요.

세월이 흘러 증언자들이 모두 늙어 죽어버리면 더욱 그렇죠.

기록은 기억의 확장이니까요. 우리는 기억을 믿듯이 기록을 믿어요.’       p.8

그녀는 영혼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좀 섬뜩하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기록하는 영혼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죽은 영이 아니다.

그녀가 만나는 영혼은 생령生靈 이라는 존재로, 말 그대로 살아있는 영혼이다.

생령이 어떤 원리인지, 그녀가 어떤 원리로 영들을 기록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세상은 원래 신비로 가득차 있으니까.

그녀는 정말 너무너무 아름다운 여인이기도 하다. 지나가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사지에 힘을 잃고, 순간적으로 자신의 자아를 잃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 남자, 이현은 훤칠한 키에 귀공자풍의 마스크, 낙천적인 성격과 유머까지 겸비한 재무부 소속의 국가 공무원이다.

세번이나 이혼경력이 있다는 것이 옥의 티라면, 티랄까.

이현은 아주 어렸을 때, 결혼하는 신부를 보고 첫눈에 빠진 경험이 있었다. 이현은 그런 그녀에게 느낀 첫사랑의 감정을 살구즙의 향기와 함께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그의 세번의 이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현은 자신이 일하는 건물 지하에서, 수십년전 바로 그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

지하 매점에서 카운터를 보고 있는 이진을 보는 순간, 이현은 그때 느꼈던 아련한 살구즙의 향을 느끼게 된다.

그의 마음 안에 꽁꽁 숨겨놓았던, 첫사랑의 감정과 그 기억들이 풀려나는 순간.

이현은 이진에게 그렇게 접근하게 된다.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 이진은 언제나 수많은 영혼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해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에 항상 정신 없이 살고 있었고, 인생의 초점 자체가 영혼을 기록하는 일에 맞춰져 있었다.

이진이 원하는 것은 쾌적하고 규칙적으로 영혼을 기록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이현이 원하는 건 이진이라는 여인.

영혼을 적는 일 외에는 그 어떤 감정도, 흥미도, 생각조차도 없는 이진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준다고 호언하는 이현과 계약결혼을 하게 된다.

뭔가 로맨스 소설틱한 제목이지만, 이 작품은 절대 로맨틱하지 않다.

이 작품을 통해, 나는 비로소 심윤경이라는 작가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순위에 넣게 되었다.

’나는 이진입니다’ 라는 챕터로 시작되는 이 독특한 이야기는 ’나는 이현입니다’ 라는 챕터로 끝날때 까지, 이진과 이현의 이야기와 이진이 기록하는 불특정 다수의 영혼들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이어져 나간다.

책 권말에 붙어있는 문학평론가의 해설처럼, 마치 셰에라자드가 등장하는 아라비안 나이트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 작품 안에서 이진은 자신이 기록한 영혼의 이야기를 절대 이현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맺은 굳건한 계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반드시 지켜주어야 하는 비밀이 있는 여인과, 그녀를 아내로 삼고 있는 남편의 약속은 그 순간부터 위태롭기 짝이없다.

이 날이선 긴장감 속에, 사랑을 갈구하는 남편과, 사랑을 주지 못하는 아내의 관계는 예정된 결말을 향해 꾸역꾸역 나아간다.

중간중간에 끼어있는 이진이 기록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그다지 평범하지 않다.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만남.

비록, 특별한 설정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이진과 이현은 보통 남녀의 만남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오죽하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라는 문장이 전 세계적으로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기본적으로 한 가정에서 20여년 동안 딸로 살아온 여자와, 다른 가정에서 역시 20여년동안 아들로 살아온 남자는 각기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터다. 그들의 소통은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다. 애초에 깔려있는 전제가 다른 두 남녀의 한 대화는 영원히 평행선을 그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현은 그것을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자신의 사랑으로 이진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이진이 가지고 있는 비밀과 맞물리며 이진이라는 여인 자체를 의심하게 된다.

이현은 단 한가지만을 원했다. 이진의 사랑.

이진은 단 한가지도 줄 수 없었다. 이진은 사랑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뭔지 알고 싶어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현도, 이진도 모두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

이현은 자신의 일과 사랑, 배우자 모두에 열정적이었다면, 이진은 자신의 일에만 열정적이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결국 자신의 일을 위해 존재하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차라리 없는게 낫겠다고 생각되 정도로 말이다. 이진이 자신을 바라봐 주기 바라는 이현. 이현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이진.

소통이 불가능한 관계. 소통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관계. 이진과 이현은 그러한 관계를 닮아있다.

사실, 인간의 삶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어쩌면 상식적이지도 않고, 삶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은 그다지 보편적이지도 않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들어가보면 평범한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상황은 특별하고, 새로우며, 차별화 되어있다.

항상 같지만, 항상 다른 하루하루. 항상 같은 일을 하지만, 항상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없는 인간의 특수성.

불합리한 삶 속에서 인간은 결국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될까?

그리고, 그 선택은 무엇을 불러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