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를 처음 봤을 때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표지의 책제목 아래에는 땅콩 통조림이 그려져 있는데, 통조림에는 ‘Macadamia Nut’이라는 상품명과 “Excellence In Nuts”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마카다미아가 바로 저 유명한 ‘땅콩회항’ 사건의 그 ‘땅콩’이다. 아마 그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카다미아의 판매가 증가했다는 기사를 본 것도 같다. 물론 그것은 ‘땅콩회항’ 사건이 불러온 아주 작은 해프닝일 뿐이고, 이 사건을 통해 많은 사람이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건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고, 문제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 역시 그때 받은 인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있던 참이었다. 조금은 급하게 출간된 책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평판사회]가 반가웠던 건 그 때문이었다.

 

“한국사회에서 기업이 20세기형 권력의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비용을 지불해왔다면 이제 대상이 바뀐 것이다.” 김윤재 변호사의 이 문장은 ‘평판사회’의 도래를 적절하게 요약하고 있다. 물론 바뀐 대상은 여론이다. ‘평판시장’의 발달에 따라 이른바 ‘오너리스크’가 기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제 분명해졌다. 한국에서 재계 서열 9위라는 기업의 민낯이 드러난 ‘땅콩회항’ 사건은 이 점을 또렷하게 입증해냈다. 기막힌 것은 세계적 최고 수준의 항공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자부하는 기업이 사건 대응과정에서 보여준 아마추어리즘이었다. [평판사회]에 글을 실은 다섯 필자들은 그런 아마추어리즘을 극복해 위기관리 시스템을 극복하는 법에 관해 조언하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쿨하게 사과하라]라는 책을 쓰기도 한 더랩에이치 김호 대표의 글이었다. 그는 ‘조현아를 위한 변명’을 시도한다. 자타가 공인하는 사과 전문가 김호 대표는 이렇게 자문한다. “과연 내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었다면 땅콩회항을 저지른 상태에서 처음부터 취재진 앞에 용감하게 나서서 잘못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진심을 담아 사과할 수 있었을까?” 실수나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의 뇌는 주변 현실을 왜곡하고 방어적이 되며 결국 자기합리화에 이른다는 신경과학의 이론으로 김 대표는 조현아의 행동을 설명한다. 조현아는 고객서비스를 책임지는 부사장의 입장에서 직원에게 지적한 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자기정당화를 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는 또한 지적한다. 조현아 개인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 자체를 혐오스러워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김호 대표의 그런 가정에 따라 생각을 이어나간다면 망설이게 될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 “과연 쿨하게 사과할 수 있었을지” 실은 나부터도 자신이 없다.

 

김호 대표는 직언하기 힘든 대한항공의 기업문화에 대해 지적하면서, 우선 ‘이상적인’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자고 권한다. 대한항공의 한 임원이 조현아에게, 이번 사건은 언론이나 여론의 측면 모두 불리하니 조현아가 모든 보직에서 사직하고, 사무장에게 사과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머리 숙여 사과하는 게 좋겠다고 직언했다고 가정해보자는 것이다. 재판에 가지 않는 게 가장 좋지만, 설령 재판까지 가서 조현아가 집행유예를 받았다면, 오너 일가는 직언한 임원을 고맙게 생각할지 김호 대표는 의문을 제기한다. 징역 1년이란 판결이 난 상황에서야 그럴 수도 있지만, 사건 발생 시점에서는 그런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뿐더러 오히려 그 임원을 미워할 가능성이 높다고 김 대표는 말한다. 문제는 한국기업 대다수가 이런 기업문화에서 자유롭지가 못하다는 점이다. 이런 문화가 극복되지 않는다면 어떤 비용을 치르게 되는지를 기업인들이 목격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기업이 평소에, 그리고 위기상황에서 각각 소셜미디어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통찰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한국 기업들은 이 부분에서 너무도 미숙하다. 어떤 기업이 불미스런 문제를 일으켰을 때, 해당 기업의 공식 트위터나 페이스북 계정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기업들은 평소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사 제품을 홍보하기에 분주할 뿐 위기상황에서 어떤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평상시 소셜미디어 관리에 관해서는 김봉수 피크15 커뮤니케이션 대표의 조언이 경청할 만하다. 그는 소셜미디어에 존재하는 브랜드에 대한 부정적 메시지를 모니터링해서 체크하고 목록화해야 한다고 일러준다. 유민영 에이스케이스 대표는 소셜미디어은 홍보의 수단이 아니라 1인칭 대화라는 점을 강조한다. ‘땅콩회항’ 같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기업은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진심을 담은 1인칭 대화를 고객들에게 시도해야 한다.

 

나는 [평판사회]를 읽으며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을 계속 떠올렸다. 이 책 필자들이 적절하게 예를 들어 보여준 것 같이, 이미 여러 선진국에서는 ‘땅콩회항’과 같은 사건에 대한 대응책들이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되어 있었다. 평소 명망 있는 외국 CEO들의 위기관리 사례에서만이라도 배울 수 있었다면,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지 않아도 됐을 거라는 생각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BBC는 자사 간판 코미디언이자 DJ였던 지미 새빌의 성추행 스캔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500만 파운드(약 80억원) 이상을 지출했다고 한다. 한국 기업의 CEO들이 정말 갖춰야 할 것은 해외 명문대의 매끈한 MBA 학위가 아니라 위기관리 능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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