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음모론은 우리 일상에서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것 같다. 사회적으로 석연찮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터뜨려진 연예인들의 열애설 보도 기사에 대해 “사건을 덮기 위한 정부의 술책” 따위를 언급하는 덧글은 너무도 진부한 반응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음모론에도 품격이 있다”고 말하는 작가가 있다(정확히 말하면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말한 것이지만, 어쨌든). 이름에서부터 뭔가 우아한 아우라를 풍기는 김희선 작가다.

 

음모론이라고 했거니와 어떤 음모론인가. 작가는 1979년 12월 13일까지 서울 시청 시장 집무실에 깔려 있었을 법한 헤라트 카펫에 관해 소소한 미스터리를 들려주기도 하지만(<페르시아 양탄자 흥망사>), 작가의 음모론은 더 넓은 영역에 걸쳐 있다. <교육의 탄생>에는 최두식이라는 천재 소년이 미국으로 건너가 나사에서 인간 마음을 조정하는 무의식 요법을 배우게 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이 무의식 요법이 국민교육헌장 반포에 응용되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분명 소설이고, 거기다 음모론이라는 걸 아는데, 정말 일어난 일인지 궁금해진다. 나도 모르게 음모론에 말려들고 있는 것일까? 읽다가 한때 천재라 불렸던 ‘최두식’이란 사람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최두식’이라는 이름을 위키백과에서 검색해보기까지 했다. 결과는? “제목이 "최두식"인 문서를 새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아래 검색 결과 내에서 비슷한 내용을 다룬 문서가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라는 문구만 뜰 뿐이었다.

 

그런데 이 음모론을 따라가는 일이 불쾌하지 않은 것은 이 작가의 음모론이 나를 수시로 킥킥대게 했기 때문이다. <라면의 황제>에는 라면이 사라진 세계가 등장하는데, 라면 유해론에 밀려 라면에 대한 박해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져 급기야 라면금지법이란 것마저 생긴 상황이란다.(세상에!) 라면 동호회 같은 소수 집단에 의해 비밀리에 ‘라면’이란 것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맙소사!) 이 기이한 이야기를 자못 진지한 어조로 진술하는 문장들 앞에서 웃음을 짓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를 테면 이런 문장. “그들이 집 뒷마당이나 베란다 한구석에 검은 무쇠솥을 걸고 직접 라면을 제조해 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극한의 추위도 라면 한 그릇이면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가 그 조직의 모토라고 했는데, 또 어떤 이들은 김기수씨가 자서전의 맨 마지막에 썼던 말인 “나는 끓였고 사람들은 먹었다”가 그들의 진짜 모토라고 우기기도 했다.”

 

김희선 작가가 제기하는 음모론은 우리의 통념을 비웃는다. <지상 최대의 쇼>에서는 비행접시에서 내려온 외계인들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환경미화 업무를 맡게 된다는 소문이 퍼지고, 환경미화원들이 찾아와 항의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그리고 <경이로운 도시>에서 그 외계인들이 이 땅에 어떻게 내려왔는지가 밝혀진다. “그들(외계인들)은 등에 낙하산을 하나씩 지고 땅으로 뛰어내렸는데, 그건 그야말로 평범한 국방색이었고 중국산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조잡해 보였다.” 국방색 낙하산을 지고 뛰어내리는 외계인이라니! 애처롭도다. 우리가 상상했던 외계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사실 우리가 상상했다고 여겨온 외계인은 상상이 아니라 이미 널리 퍼져있는 통념에서 끄집어낸 것이 아닌가.

 

이 소설에 대해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라는 반응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음모론일 뿐 아닌가. 그런데 김희선 작가가 제기하는 음모론의 양상은 우리 현실과 너무나도 잘 들어맞기에 절실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경이로운 도시>에서 W시에 나타난 외계인들을 식품으로 가공한다는 발상은 그렇게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단지 이 외계생물체가 외계‘인’이라는 게 문제가 될 수 있었는데, 그 문제는 외계‘인’이 아니라 외계 ‘식물’로 명명하는 것으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이 지구상에서 어차피 중요한 건 인간뿐이고, 그 외계생물체 안에 인간에게 유용한 영양소들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는데 더 가릴 이유는 없다. 실제로 외계인들이 한국에 내려온다면, 그리고 그 외계인들이 우리 대통령님께서 그토록 힘주어 말씀하시는 ‘미래 먹거리’가 될 만하다면, 과연 그들을 식용으로 가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음모론 당사자들의 사연만 보아도 그렇다. 당사자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 관해 말한다면, 참으로 애잔하기 이를 데 없다. <개들의 사생활>의 화자 ‘ㄱ’은 개들이 인간의 뇌에 프리온을 설치해 텔레파시 신호로 인간을 조종한다고 굳게 믿는다. “개를 인간보다 더 사랑하라.”는 궁극의 신호 말이다. 그런데 어쩌다 ‘ㄱ’은 이 해괴한 신념을 지니게 되었나? 바로 ‘ㄱ’보다 개를 더 사랑한 ‘ㄱ’의 엄마 때문이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에서 김홍석씨가 쟁기로 탱크를 내리친 행동은 ‘반전 시위’의 일환이라거나 무슨 거창한 동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술김에” 했던 것으로 밝혀진다. 그러고 보면 음모론이 피어나는 시기는 언제나 개개인의 삶이 존중받지 못할 때였던 것 같다. 그 점을 작가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는 [라면의 황제]을 읽으며 작가가 말한 음모론의 품격을 가늠해보았다. 결과는? 이미 살펴본 대로다. 무엇보다 나와 세상을 돌아보게 하는 음모론임에야 마다할 수가 있나. 거기다 그것이 흥미진진하고 기상천외하기까지 하다면? 더 따질 필요 없다. 무엇보다 [라면의 황제]에서 작가가 그랬듯이 음모론과 당당히 마주한다면, 음모론을 우리 삶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 바꿔놓을 수 있지 않을까? ‘고품격’이란 말이 어울리는 음모론 소설을 만났다. 계속된 청와대발 음모론으로 지긋지긋하던 이번 겨울 가장 유쾌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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