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어디선가 “人生成功單十百” 이란 얘기를 들었다. 한평생 살다가 죽을 때 한 명의 진정한 스승과 열 명의 진정한 친구, 그리고 백 권의 좋은 책을 기억할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라는 뜻이다. 한 명의 진정한 스승, 열 명의 진정한 친구는 손에 꼽을 수 있겠는데 그냥 백 권의 책도 아니고 백 권의 ‘좋은 책’이라고 하니 성공이 쉬운 일은 아닌게로구나 했다.

오늘 난 내 인생의 성공을 재촉하는 한 권의 ‘아주 좋은 책’을 품었다.

장영희 교수는 그의 책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서강대학교 교수 평가 점수를 매길 때 수필집을 낸 것은 0점이라고 푸념 아닌 푸념을 한 적이 있다. 진정한 수필의 내공을 모르는 행정인들의 처사이다. 물론 해산의 수고 없이 별 가치도 없는 글을 몇 마디 끄적거리고서는 수필집이라고 떡 하니 내 놓는 이들의 만행이 초래한 안타까운 결과일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됐건 어쩌면 그 어느 작품보다 더 깊은 사색과 더 농후한 삶의 진액으로 말미암아야 하는 수필이 이런 푸대접을 받는다는 게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이 책 “인연”을 읽으면서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프란츠 크사버 카프스에게 쓴 편지(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소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주위의 사물들, 당신 꿈의 영상(映像), 추억의 대상들을 이용하십시오. 당신의 생활이 비록 빈약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을 탓하지 말고 평범한 생활이 갖는 풍요로움을 끌어낼 수 있는 시인이 못 되는 자신을 탓하십시오. 창조하는 자에게는 가난이 없으며, 그냥 지나쳐 버려도 좋을 하찮은 장소란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당신이 감옥에 갇혀서 바깥 세상의 소리조차 당신에게 전해지지 않는 경우라도, 당신에게는 여전히 …후략…”

물론 이 글은 릴케가 완전 초짜 시인에게 이러한 삶의 태도를 ‘연습’할 것을 충고하는 글이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琴兒 선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께서 연습을 통해 터득하게 되신 것인지 아니면 본디 그런 성품을 타고나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책을 읽는 내내 그 분의 순박한 감성과 때 묻지 않은 청초함과 깊은 지성과 폭 넓은 사고와 인간 뿐 아닌 온 사물을 향한 존경과 대가에게서만 볼 수 있는 고매한 겸손이 한데 어우러져 독자를 압도하는데 그것이 더욱 위대한 이유는 모든 글이 선생의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가 산수 문제를 풀다가 도저히 모르겠어서 같은 동네 살고 있던 아인슈타인에게 찾아가 물어봤는데 이를 나중에 알게 된 소녀의 어머니가 아인슈타인에게 가서 사과를 드리자 오히려 아인슈타인은 ‘제가 소녀에게서 배우는 것이 더 많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를 적어 놓으신 글을 읽으며 어느 기사에서 봤던 난영이(선생께서 하버드 계실 적에 딸 서영이를 위해 선물로 사신 인형)를 안고 소년처럼 환하게 웃고 계시던 선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이 그분의 삶의 철학이다. 아직 살아계시다면 생면부지인 내가 그 분의 앙상한 두 손을 덥석 붙잡고 감사하다고 말씀드려도 내치지 않고 등을 토닥이며 그 착한 미소를 아낌없이 보여주실텐데..

충분히 남들 앞에 으시댈만한 학력과 인맥과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그리 겸손하게 사셨던 그분의 삶에 비추어보니, 아주 작은 꼬투리만 잡아도 나대기 좋아하는 나의 저급한 인격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이렇게 선인의 노고로 어리석고 세속적인 후인의 삶이 깨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풍요로운 유산인가. 그나마 씻을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해지기 전에 선생을 만나 조금이라도 정화시킬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 語錄

·得了愛情痛苦

矢了愛情痛苦

 
·간다 간다 하기에 가라 하고는

가나 아니 가나 문틈으로 내다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아라

 
·그(春園)의 일생은 병의 불연속선이었다. 그러나 그는 낡아 빠지거나 시들지 않았었다. 마음이 평화로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는 싱싱하고 윤택하고 ‘오월의 잉어’ 같았다.

 
·“늙어서 젊은이와 거리가 생김은 세대의 차가 아니라 늙기 전의 나를 읽음이다” -痴翁

 
·어린아이같이 웃기를 잘하여 점잖지 않다는 것은 또 한 친구의 말이었다. 그래 나는 어느 일요일 아침, 성난 얼굴을 하여 보았다. 그랬더니 서영이가 슬픈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문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내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일은 없다. 나는 얼른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잘생기지도 못한 얼굴이 사나워 보인다. 나는 씽긋 웃어보았다. 그리고 내가 정신의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날 하루 종일 서영이하고 구슬치기를 하였다.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내 이미 늙었으나, 아낌없이 현재를 재촉하여 미래를 기다린다. 달력을 한 장 뜯을 때마다 늙어지면서도 나는 젊어지는 것을 느낀다.

…중략…

결혼식을 마치고 퇴장하는 신부의 하얀 드레스는 금방 퇴색이나 된 듯하다. 사실 그 쑥스러운 상견례相見禮를 할 때, 그리도 기다렸던 결혼식은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러나 허무도 잠깐, 그의 앞에는 새로운 희망이 있다. 행복할 가정, 태어날 아기, 시간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기에 인색하지 않다. 그러기에 나에게는 언제나 다음 토요일이 있는 것이다.

·여성과의 우정은 윤기 있는 위안을 준다. 영민한 여성과의 우정은 다채로운 기쁨을 주고, 순박한 여성과의 우정은 영혼을 승화시켜 준다. 이성간의 우정은 사상의 변모이거나 결국정과는 달리 우정은 담박하여 독점욕이 숨어있지 않다. 남녀 간의 우정은 결혼 후에는 유지되기가 어렵다. 그 남편의, 그 아내의 교양 있는 아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내, 이 세상에 아내라는 말같이 정답고 마음이 놓이고 아늑하고 평화로운 이름이 또 있겠는가. 천년 전 영국에서는 아내를 ‘피스 위버(Peace-weaver)’라고 불렀다. 평화를 짜 나가는 사람이란 말이다.

피천득, 금아, 인연, 샘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