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 관계'는 계약서 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도 강자와 약자 즉 갑과 을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일찍이 김수희 씨가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하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자연스럽게 자발적 '을'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사랑에 빠진 당사자들을 제외하곤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송중기나 김수현과 같은 선배가 캠퍼스를 가득 채우고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듯이 말이다. 브레히트도 이렇게 말했다. 그녀에겐 없지만 자신에게 있는 약점 하나가 '나는 당신을 사랑했다'(p9) 라고.

이해관계로 얽힌 전자의 경우 갑의 횡포와 억압은 결국 을의 분노를 폭발시키고 말지만 애정으로 설킨 후자는 어떻게 될까.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랑은 통제당하면 떠난다.(p32)

 

 

언젠가 읽었던 소설(세상을 등지고 사랑할 때) 속 한 장면이 계속해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인상 깊음에 있다기보다는 풀리지 않는 의문 혹은 의심에 있었을 것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전시사항을 자각하지 못한 채 너무나도 고요히 사랑을 나누던 남녀 주인공이 묘사되는 장면이었다. 헛웃음이 나게 했던 농담 같던 이 장면이 그에 의해 어쩌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사랑은 하나의 예외만을 남기고 모든 감각을 마비시켜버릴 수도 있다는, 무의 세계이자 부동의 세계를 가능케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말이다.

 

 

하얀 종이를 꺼내 좋아하는 것들로 빼곡히 채워보고 싶기도 했다. 아마도 그가 적어놓은 것 중 중복되는 항목이 많았을 것이다. 내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아 기분 좋은 떨림이 느껴지기도 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그때는 알 수 없었던 어떤 이의 이 말도 그를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때론 글로도 사랑을 배울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말했다. 내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나는 조심한다. 걸어가는 길 위를 살피며 빗방울이 나를 죽일까 봐 두려워하면서.(p24)

 

 

 

사랑의 달달함에 허우적댈 쯤 마주친 한 문장(인류의 절반은 오직 다른 절반의 기억력이 구멍투성이인 덕에 살아간다)이 차가운 이성을 다시금 불러오기도 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과거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그의 말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은 망각과 반복의 순간이 지금일지도 영웅을 원하는 곳에서 인공의 영웅이 만들어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낭만으로 따듯하고 달콤하게 때로는 냉철함과 냉소로 시리게 그는 말했고 나는 깨닫고 기억하고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