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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서 토의 수업 중 ‘브레인 라이팅’ 수업이 있다. 브레인 라이팅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Battele Institute에서 개발된 기법이다. 이 방법은 참가자 전원이 소외되지 않고 시작부터 끝까지 토의․토론에 참여하게 하는데 가장 큰 목적이 있다. 쟁점이 되는 사항에 대해 다양한 자료를 통해 학습한 후, 개인의 생각을 포스트 잇에 다양하게 적고, 모둠원 각자의 생각을 하나하나 모아서 범주화 하는 수업인데, 이 수업을 하다보면 생성된 아이디어가 또 다른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촉진제 역할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 수업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브레인 스토밍에서 보여지는 개인의 영향력을 줄여 모둠원 전체의 의견이 범주화 된 성숙되고 완성된 아이디어의 집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여름학기 초등역사교육특강의 교재 󰡔역사가 사라져 갈 때󰡕를 읽으며 쟁점분석을 위한 토의․토론 기법인 ‘브레인 라이팅’이 자주 떠올랐다. 브레인 라이팅 수업을 진행하는 단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반적인 진행방법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단계는 교사가 주제를 주고, 학생들은 주제에 대한 개인의 생각을 주어진 포스트 잇 수만큼 적는다. 이때 개인의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기록한다. “옆 사람의 의견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간단한 규칙을 추가해주면 자신의 의견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몇몇 아이들도 다른 친구들의 의견을 절대 보지 않는다. 두 번째 단계는 모둠안에서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한 장씩 자신의 의견을 내어 놓는다. 이 때 다른 사람의 의견과 내 의견이 비슷하다면 내 의견을 다른 사람 의견 아래에 붙인다. 이렇게 돌아가면서 모둠원 모두의 포스트 잇이 없어질 때 까지 의견을 교환한다. 세 번째 단계는 모아진 포스트 잇에서 옮겨서 분류할 것이 없는지 논의한다. 이 단계가 이 수업의 핵심이라 생각되는데, 이 때 아이들은 일종의 ‘합의’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된다. 수업의 네 번째 단계에서 분류되고 모아진 포스트 잇을 대표할 만한 상위 개념을 적어 넣는다. 마지막 단계에서 발표가 진행되는데 교사는 학생들이 발표하는 상위 개념을 모아 학급에서 주어진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대표 개념을 모아내며 더 좋은 개념을 유도할 수 있다.

교실장면에서 주로 활용하는 ‘브레인 라이팅’이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이야기하는 이 수업에서 자주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가 사라져 갈 때󰡕의 저자들은 객관적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 속에 던져진 오늘날의 역사가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다룬다. 세 가지 지적 절대주의(과학과 진보, 그리고 민족주의)는 뉴턴의 과학에서 시작하여 서구 세계의 중심 지위를 차지한다. 객관과 중립으로 핍진성을 가지는 과학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참이었다.(p.41) 이러한 과학은 균형 잡힌 정부와 자율적인 경제, 선거, 헌법, 자유시장을 위한 모델이 되었다. 1776년 애덤 스미스가 외형상 혼란스러워 보이는 시장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뉴턴식 과학에 등장하는 ‘신’의 손에 의지한 덕분이었다.(p.45) 즉 과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표준이 된 셈이다. 중세라고 불리던 이전 시대까지의 절대적 권위에 있던 종교와의 문화전쟁은 필연적이었다. 계몽주의의 대표주자였던 필로조프들은 성직자의 손에서 학문을 빼앗아 왔으며, 도덕이든 정치이든 역사에 관한 것이든 모든 지식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p.50) 이에 따라 역사에 대한 세속화된 접근법이 시도되었고, 해석학을 한편으로 만들기 위해 신화와 성서를 끌어내리려 노력했으며 성공했다. 계몽주의자인 필로조프들은 물질과 개인이라는 두가지 핵심을 포착하고 구체제(성직제도, 독선, 앙시앵레짐의 정부구조)를 무너뜨리며 자유주의적 개념과 결합했다. 이런 모레스는 기존의 관행들과 공존할 수 없었으며 혁명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p.58)

과거와 다른 시간개념은 계몽주의 철학과 함께 새로운 근대성을 발명했다. 헤르더나 헤겔과 같이 계몽주의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 낭만주의 역사가도 있어 상대주의의 길이 열리기도 하지만, 19세기는 과학의 절대성, 진보를 믿었다.

19세기에는 전문적 역사가들에 의해 진보의 제국주의가 등장한다. 사실을 지배하기 시작하며 세미나와 같은 과학적 모델을 받아들인 연구방법을 사용한 랑케의 민족적 실증주의가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무엇보다 마르크스, 베버, 뒤르켐이 20세기 서구 역사해석의 주요 학파가 등장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마르크스주의, 아날학파, 미국의 근대화 이론이 그것인데, 이들은 모두 보편적용가능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한다.

미국은 독립을 위한 지상과제를 해결하여 하나의 미국이 될 듯 보였다. 하지만 이후 또 다른 분열과 위기를 겪으며 남북전쟁이라는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프랑스혁명 이후 대중정치에의 논쟁과 함께 미국의 참여 정치 성격이 확정 되었고 미국적인 것을 만들어가는데 실용주의와 시민적 참여의 원칙이 확립되어 갔다. 기존의 엘리트들과 달리 개혁가와 부흥주의자들은 미국이 대중적 기획을 통해 개인의 완성이 실현되는 민족주의적 ‘상상의 공동체’를 전쟁 그 자체에서 생성된 영웅주의와 미덕의 내용으로 채워나갔다.

국가는 민족주의의 이상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갔으며, 개개인은 천부인권의 정신으로 자율성과 실용주의를 확립했다. “지구상의 가장 아름다운 지역 가운데 하나이며 많은 인구를 지원하고 문명과 과학과 참된 종교의 터전이 되도록 창조주가 운명으로 정해준 것 같은 터전이, 계속하여 자연 상태로, 소수의 비참한 야만인들의 땅으로 남아있어야 할 것인가?(p.152)”라는 윌리엄 헨리 헤리슨의 발언으로 알 수 있듯이 이 과정에서 서부 정착민은 새롭고 활기찬 민주적 운명의 운반자로 그려지고 토착 미국인들은 영토를 빼앗기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그려졌다. 프레데릭 잭슨 터너의 개척지 테제와 같이, 이것은 미국의 어두운 부분을 가릴 수 있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과학, 진보, 민족주의는 더글러스의 말처럼 집단의 기억을 통제하여 하나의 거대한 국가이미지를 형성하고 앞으로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20세기가 열리며 산업의 진보는 미국의 유산에 대한 재분배 논의를 일으켰다. 서부개척지의 빈 서판이 꽉 채워지면서 미국인들의 상상적 탈출구를 막아버렸다. 뿌리 뽑힌 유럽인의 예상치 못했던 이주로 WASP의 칼뱅주의적 신교도은 잡종화를 걱정하며 새로운 유형의 인종구도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 남북전쟁 이후 남부재건의 실패, 흑인에 대한 연방정부의 보호 철회와 같은 정책으로 인해 유기체적인 국가의 느낌이 무너져버렸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미국적 민주주의는 신뢰를 잃어 이제는 국민 전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갈등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진보적 역사가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비어드와 같은 진보적 역사가들은 헌법을 ‘신화’의 영역에서 ‘실질적’영역으로 끌어내려 그것이 노동자들의 권익에 피해를 준다고 하여 독립선언서와의 분리를 시도했다. 그러나 진보적 역사가들 조차도 “미국이 민주주의의 약속과 계몽주의의 원리를 준수했는가?”하는 물음에서 벗어나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페리 밀러와 같이 청교도를 주장하며 미국적 목표를 낮추었다. 미국 선조들은 민주국가의 선조가 되기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라 유럽 기독교 왕국의 통일과 순수성을 복원해야 한다는 임무를 띄고 왔다는 사실을 직면했다. 이것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실질적 수준에서 해석하고 그들의 선조에 대한 이미지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밀러의 역사적 접근법은 왜 미합중국이 공산주의와 파시즘과 전체주의 체제로부터 강력하게 이탈했는지 설명하는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시기에 스푸트니크 충격 이후 과거 보스턴의 고고한 지식인들의 이야기에 쉽게 동화될 수 없는 다양한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사가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공교육의 확장과 함께 미국 전역에서 배출되어 장기간의 기록들을 해석하여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계층의 행동 패턴을 추적하는데 성공했다. 사회사가들이 밀러와 같은 이상주의적 강조와 만난 지점에서 중심부에서 곁가지로 밀려난 자들의 생애를 망각의 세계로부터 꺼내 왔다.

새로운 사회사는 모든 것을 모래알처럼 만든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핵전쟁, 인구 폭발, 가정의 안정성 쇠퇴, 에이즈 전염, 환경오염 등에 관한 미국인의 우려와 함께 청교도적인 삶과 연결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사 연구는 영웅적 과학의 맨얼굴 앞에 더 다양해지고 분화되었다. 토머스 쿤으로부터 시작된 상대주의의 길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에 영향을 미쳤다. 영웅적 과학은 형이상학적 리얼리즘의 갑옷으로 둘러 싸고 나아갔다. 과학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골격을 가지면서도 여전히 진리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세대는 과학의 갑옷을 서서히 벗겨나갔다. 뉴턴은 연금술에 매혹되어 있었으며 그의 만유인력은 신의 세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다윈 역시 진화론에 앞서 철저한 인종주의자였다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그로 인해 사회는 영웅의 거대한 갑옷 보다는 영웅의 인간적인 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주의는 과학에서의 진리의 존재가능성을 우회하면서 역사가들의 요구도 채워주지 못했다. 사람들이 상대주의의 길을 걸어갈 때마다 그 길은 더 어두워지고 터널에서 빛은 점점 더 뒤로 물러났다.

과학적 진리추구의 비영웅적이며 매우 사회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성격 때문에 과학은 지금도 인식을 위한 노력의 중심에 서 있다.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는 민주적 사회는 과학의 자리매김에 모든 지식의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정신 밖의 사물에 대해 독립적이고 성공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인간적 능력에 대한 긍정에 열려 있다. 즉 가장 타당성 있는 해결책은 과학의 역사성, 과학자와 과학적 문헌의 역사성을 이해하면서도 이성적 과정과 사회적 과정의 상호 침투를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p.252)

1980년대 이후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근대성의 위기를 가져왔다. 개인은 없고, 진리도 없으며, 과학은 객관적일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주의의 기획 전체를 공격했다.

과거의 마르크스학파, 아날학파, 근대화이론가들은 경제학과 사회학을 활용한데 비해, 문화사가들은 인류학과 문학이론에 도움을 구했다.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의 개념처럼 ‘문화적 지배력’을 강력하게 주장한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있었고, 집단적으로 공유된 정신적 관행이나 사회구조에 집중하는 아날학파의 관점도 있었다. 하지만 학문을 추구하는 길은 객관적이고 포괄적인 역사의 개념적 단층선을 탐구할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그런 역사의 역할을 옹호함으로써 전통주의적 비평가와 포스트모더니스트 사이로 난 항로를 따라야 한다.(p.267)

저자들은 학문의 방법으로 실용적 리얼리즘을 이야기한다. 언어와 관례들이 아무리 사회적으로 구축된 것이라 하더라도 세계에 도달하여 그 내용을 충분히 진실하게 묘사를 하는 경우가 일부 있다는 사실을 상대주의자들에게 상기시킨다. 이로써 과학을 기쁘게 동지로 삼는다.(p.325) 따라서 인간은 과거 현실의 거짓 표상과 참된 표상을 분간할 수 있고, 또 그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행동하는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 모두가 그런 구분을 하도록 도와주는 표준을 만들 수 있다.(p.341) 역사가는 망각에 항거하는 기억의 투쟁에는 권력에 대해 투쟁하기도 하지만, 그것과 함께 과거가 인식 가능한지에 대한 의심, 뭔가 실재하는 것에 대한 망각이 아닌가 하는,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의심에 저항할 힘도 가져야 한다.(p.354)

상대주의자와 전통주의자 모두가 오류를 범한 곳은 위기의 본성에 대한 분석에서다.(p.362) 현재 직면한 지식의 위기의 주 원인은 모든 전선에서 지적․정치적 절대주의가 붕괴하기 때문이다.(p.362) 포괄적인 국가 역사는 그 나라가 교육을 위해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인 정언적 명령이다. 역사의 파편들은 그것들을 파편으로 만드는 전체와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p.386) 또, 미국에서의 일련의 특정한 정체성들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은 국가다. 그 권위와 도덕적 힘과 물질적 부를 가진 전체와, 전체 속에서 각각 누릴 몫과 장소와 권리를 주장하는 각 개별 집단 간의 비판적 관계만이 다문화적 토론을 이해 가능하게 할 수 있다.(p.395)

진리에 대해 헌신하고 그 잠정적 진리의 위치에 놓인 학문을 향해 치열하게 토론한 것만이 우리의 사회와 역사, 그리고 국가가 진보하는데 가장 필요한 일이다.

도입부에서 이야기한 ‘브레인 라이팅’수업에서의 객관적 진리에 대한 권위는 어떻게 확보될까? 첫 번째 단계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이 때 개개인의 생각은 모두 존중된다. 지식의 상대주의를 인정하는 셈이랄까. 이어 두 번째 단계에서는 아이들 수준에서 상대적인 지식이 통용되는 객관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자신의 생각이 다른 친구의 생각과 함께 범주화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을 경험한다. 세 번째 단계는 실용적 리얼리즘의 단계다. 모아진 생각에 오류는 없는지 점검하고, 다시 자신들의 진리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하나하나의 모둠에서 제시된 쟁점들의 개념을 학급의 전체단위로 묶는 장면은 객관적 진리를 확보하려는 노력이다. ‘나’의 의견과 ‘모둠’의 의견이 모아졌을 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학급’의 의견이 어떻게 모아지는지 확인하면서 쟁점에 대한 진리를 찾아가게 된다. 이때 모아진 진리는 ‘확정된’ 진리가 아니라 ‘잠정적’ 진리로서 앞으로 여러 학급의 의견을 더 모아본다면 좀 더 확정된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옆반 선생님과 가끔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혁신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로서 교사 개개인의 모든 의견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 즉 학급의 모든 상황을 개별적으로 다 인정해야 한다 - 는 것을 어디까지 인정해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절대적 진리가 있으며, 이는 학교장의 권위에 의한 결정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이 옆반 선생님의 이야기다. 나는 선생님들이 운영하는 학급과 학급이 하나의 섬이 되지 않도록 연결해주는 다리가 필요할 뿐 학교장의 권위에 의한 결정은 그 밖에 있는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합의, 다수결, 권위에 의한 결정이 학교에서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의 의사결정 방식이라는 점은 전제로 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했던 지식의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적 관점에 대해 나의 인식의 지점은 어디쯤일까? 학문에 대한 냉소주의나 니힐리즘은 아니더라도 좀 더 상대주의적인 부분에 있고 싶다. 하지만 객관적 진리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진리탐구를 위한 개개인의 헌신, 조직문화, 잠재적 진리를 향한 치열한 토론을 위해서는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고 싶다.

역사가사라져갈때, 린헌트, 김병화, 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