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퀴즈쇼>

민수와 나, 책에서 걸어나가자

  이십대 후반의 민수는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키워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의 빚으로 집을 빼앗기는 위기의 순간을 맞는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연히 나간 퀴즈쇼에서 지원이라는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고, '퀴즈'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제의를 의문의 사나이에게 받게 된다. 그 제안을 거절하고 근근히 지내던 도중 옆방녀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퀴즈'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데...

 

지금껏 화려한 승자의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대놓고 루저'는 아니었다. 하루하루 참패하는 삶. 어쩌면 나는 이런 명백한 실패를 목도하지 않기 위해 지금껏 교묘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왔는지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수가 없었다.(356p)

이민수에게서 지금의 나를 목격하다.  

 

	내 마음속의 패배주의는 언제나 낙관주의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도대체 그렇게 많은 돈이 왜 필요해? 그런 돈 없이도 잘 살아왔잖아? 인생에서 중요한 건 그런게 아니잖아? 이런 달콤한 유혹이 실은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말의 다른 버전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언제나 유독한 희망대신 달콤한 무위로의 도피를 선택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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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속의 인물에게 이렇게 공감해본적은 처음이다. 지원이 민수에게 "너는 달팽이처럼, 지식이라는 딱딱한 껍데기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아."(251p)라고 말했을 때, 난 민수처럼 말을 얼버무리며 답을 회피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남들이 보았을 때 1등의 삶을 산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항상 남들이 부러워할만큼의 승리를 겪었고 남들보다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며 많이 배웠다. 그리하여, 지식은 남들에 비해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원이 말한 대로 지식의 딱딱한 껍데기 안에 웅크려있고, 방어적이었다.

  민수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았다. 아는 것은 많아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아는 체 하지만 결국 다 책에서 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것들을 의심하면서 시도해 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피는 현실세계에서, 연애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지원의 애정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널 좋아할 리 없다고 의심하고, 현실에서는 명백한 실패를 피하려 도전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지식의 껍데기 안에 숨어있는 민수와 나 같은 사람이 지식이 없는 사람보다 무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껍데기 안에 있는 사람은 지식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에 비하여 '난 다 알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도전하지 않는다. 실제로 자기가 겪어본 것도 아니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아올 수는 없다. 무언가 실패하게 될까봐 먼저 달아나는 것, 그리고 그 핑계를 찾아온 삶은 결국 더 슬픈 현실을 낳게 될 뿐이다. 책에서 걸어나와서 나만의 책을 써 내려가야지.

'퀴즈'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퀴즈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직 나는 명확하게 퀴즈쇼의 의미를 모르겠다. 이춘성이 말한 대로, 철저한 실력의 세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운이 지배하는 세계, 진지하게 운명에 자신을 내던지는 자들의 세계라면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과 똑같지 않을까?

  하지만 어차피 운이라는 것을 인간의 영역에서 관장할 수 없는 것이라면, 최대한 실력을 갖추고 운명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감각을 날카롭게 벼리고 촉수를 곤두세워 자기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온몸으로 느끼면서.(이 말은 218p 곰보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다양한 분야에서-어떤 분야는 내가 정통하고, 어떤 분야는 내가 전혀 모르는-질문이 주어지는 퀴즈와 같이, 우리 인생도 어떤 한 분야의 질문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많이 알고 많이 경험하려 노력하면서 다음 질문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성장소설, 퀴즈쇼, 김영하, 회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