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을 읽을 때 가끔 느끼는 것이지만 정서통일이 안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괜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베이징레터를 처음 펴들었을 때 나는 또다시 그들과의 맞지 않는 정서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할아버지와 친엄마가 누구인지 불분명한 형제들과의 일상생활에 대한 에피소드는 유쾌하게 그려져 있지만 그리 맘편히 바라볼 수 있는 가정사는 아닌 것이다. 더구나 할아버지의 애인이라고 소개된 그녀와 애인관계를 맺는 이야기의 주인공 키스는 도무지 정체가 뭔가 싶기도 하다.

정정하게 생활하던 할아버지가 조금씩 기력이 약해져만 가던 어느날, 형제들은 할아버지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선물을 드리기로 한다. 그런데 북해도 아니고 프랑스도 아니고 프라하도 아닌 중국으로 가겠다는 막무가내의 할아버지를 모시고 가야하는 임무 제비뽑기에서 키스가 뽑힌다. 아니 왜 하필 중국인것이야?
할아버지와 키스의 중국 여행경비까지 다 모은 형제들은 모든 것을 키스에게 일임하고 떠맡긴다. 그리고 여행경비를 받아든 키스는 할아버지의 애인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애인이 되었고 결혼을 약속한 프란치스카와 카지노에서 경비를 다 탕진해버리고 만다. 그렇게 가기 싫어했던 중국여행은 경비가 없어서라도 출발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여행을 미루는 키스를 두고 혼자서라도 출발하겠다며 할아버지는 고물자동차를 몰고 집을 나선다. 며칠 후 그에게 완행열차로 팔십분이면 도착하는 베스터발트에서 걸려온 전화 한통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며 그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신분증을 들고 찾아오라는 전화였다.
백살까지는 거뜬히 사실것만 같았던 할아버지의 죽음이라니, 중국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는데 겨우 두시간도 안걸리는 거리에서 할아버지의 부고를 알리고 있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끊임없이 새할머니를 데리고 오고 친엄마의 존재마저 불분명한 형제들과의 생활, 할아버지의 애인을 손자인 키스가 다시 애인으로 삼아 결혼까지 약속하고 할아버지에게 선물로 여행을 보내드린다해놓고는 경비를 탕진해버린 후 방관자처럼 두손놓고 지내는 키스에게 할아버지의 부고가 알려지지만 곧바로 그 죽음을 확인하지 않고 외면하려는 모습...
사실 그 모든것이 다 낯설었다. 그리고 키스가 할아버지와 중국에 함께 여행을 떠난 것처럼 속이고 식구들에게 중국에서 띄우는 엽서를 쓰는 것 자체가 유머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씩 마음이 끌려들어가기 시작한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중국에 도착한 키스는 할아버지의 옛추억을 찾아 길을 떠나는, 온통 거짓말뿐인 편지를 쓰고 있는데...
키스만이 행하는 할아버지에 대한 추모의식을 들여다보면서 왠지모를 유머속의 슬픈 감동이 밀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거짓말이고, 그 거짓말을 담은 소설 역시 허구이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단순히 ｀거짓말이야!｀라는 한마디로 치워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는 한마디라도 마지막 인사가 되는 걸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여행 중이었지 않은가. 사람들에게 그는 그저 눈앞에서 사라졌을 뿐인 것이다˝(224)라고 말하는 키스의 말을 그저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는 그저 눈앞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한 인터뷰에서 저자 틸만 람슈테르는 “작가로서도, 독자로서도 저는 유머 있는 작품이 좋아요. 지나치게 진지한 소설은 감동해야 할 부분과 슬퍼해야 할 부분을 너무 빨리 눈치 채게 하거든요. 유머 있는 소설은 그런 것들을 좀더 잘 감춰주죠. 물론 저는 재밌으면서도 깊이 있고, 진지한 소설을 쓰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베이징 레터가 재미있고 진지한 소설인가? 아직 명쾌하게 그렇다,라는 말은 못하겠지만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는 소설이기는 하다고 말하고 싶다. 유머속에서 슬픔과 감동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소설, 저자의 다른 작품을 기대해보게 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