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세계를 눈에 보이지 않는 수식(數式)의 세계로 사랑하다

‘당신의 H는 무엇입니까.’

얼마 전까지 TV를 수놓던 모 회사 광고의 카피이다.

명예, 조화, 역사, 집……. 광고에 등장하는 유명인들의 초상과 함께 그들이 말하는 H가 그 밑에 하나씩 지나간다.

눈에 보이는 이 세계 속에서 현재 각자가 추구하고 있는 것과 앞으로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던 광고.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었을 때 이 광고의 카피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1991년 ‘임신 캘린더’로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알리게 된 오가와 요코가 2004년 일본 전국의 서점 종사원들이 뽑은 ‘올해의 소설’에서 1등을 수상한 소설이다.

가볍게 집어 들었다 글이 가지는 재미와 의미에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는 한 줄 평이 줄줄이 이어져 있던 이 소설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책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를 보러갔던 일 때문이었다.

데뷔 이래로 병을 앓는 사람을 중심으로 그를 통해 일어나는 아픔과 결여, 폐쇄된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보여준 오가와 요코는 이 소설에서도 ‘80분 짜리 기억 테잎을 가진 남자’를 키워드로 삼았다.

설정대로 그는 과거 한 시절에 겪은 교통사고로 인해 뇌가 손상되는 바람에 사고가 일어난 1975년 이후의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현재는 늘 80분, 정확하게 말하면 1시간 20분이 전부다. 그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래도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그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수식들이다.

총망받던 수학자였던 그가 타인과 이루는 소통 방식 역시 수식을 통해서이다.

그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집을 방문한 화자(話者)인 ‘나’에게 던진 첫 질문 또한 이름이 아니라 신발 사이즈가 몇이냐는 것이다.

그는 ‘나’의 생일인 2월 20일을 이루는 숫자 220이 자신이 대학 다닐 때 학장상으로 받은 부상이었던 손목 시계 번호 284과 이루는 관계가 우애수라는 것으로 감탄해 마지 않는다.

“220의 약수의 합은 284. 284의 약수의 합은 220. 바로 우애수야. 쉬 존재하지 않는 쌍이지. 페르마도 데카르트도 겨우 한 쌍씩 밖에 발견하지 못했어. 신의 주선으로 맺어진 숫자지. 아름답지 않은가. 자네 생일과 내 손목 시계에 새겨진 숫자가 이렇게 멋진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니.”

박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것은 소수였다. 그것이 사랑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박사에게 소수는 말 그대로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는 소수를 아끼고 어루만지고, 온갖 정성을 다하고 존경했다. 대로는 애무도 하고 때로는 무릎을 꿇기도 하면서 한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소설 곳곳에 서술되는 박사가 ‘나’에게 이야기하는 수학적 관념을 통해서 그가 가슴에 품고 있는 수식의 아름다움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다.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숫자인 소수, 조심성이 많은 숫자인 루트 마이너스 1, 꼼꼼한 사람이 만든 숫자임에 틀림없는 삼각수, 어떤 숫자든 가리지 않고 따듯하게 감싸 안아 그에 합당한 신분을 부여하는 기호인 루트.

딱딱하고 메마른, 심지어 재미없기까지 한 숫자들의 ‘파티’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아름답고 정겨운탕글"> 

박사가 ‘나’에게 말하는 방식대로 우리나라 수학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면 그토록 많은 학생들이 수학에 치를 떨지 않을 것이다 싶을 정도로 그가 말하는 수식은 쉽고 아름다웠고 게다가 삶에 대한 심오한 생각들로 가득하다.

어떤 식든, 어떤 숫자든 함부로 다루기를 주저하며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말하는 그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상적인 일(전자레인지 스위치를 돌린다든지 외출한다든지 하는 것)에서는 몹시 서투르고 바보스럽기까지 하다.

화자(話者)인 ‘나’는 이런 그를 돌보는 경력 10년 이상의 배태랑 파출부이며 어린 아들을 둔 미혼모이다.

열 여덟의 어린 나이에 한 아기의 엄마가 되고 사회에서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인 파출부(‘나’는 비록 자긍심을 가지며 나름대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지라도)인 ‘나’에게 그가 말하는 수식들은 수식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자, 여기에다 직선을 하나 그어보라구.”

나는 젓가락을 대고 연필로 직선을 그었다.

“그렇지. 그게 직선이야. 자네는 직선의 정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군.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라구. 자네가 그은 직선에는 시작과 끝이 있어. 그렇다면 두 개의 점을 최단거리로 이은 선분인 셈이지. 원래 직선의 정의에는 끝이 없어. 한없이 뻗어 나가는 선이지.……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실제 종이에 진정한 의미의 직선을 그리기란 불가능하다는 얘기야.”

나는 연필 끝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럼 진정한 직선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여기에 밖에 없어.”

박사는 자기 가슴에 손을 대었다.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어.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지.”

배가 고픈 것을 참아가면서 사무실 바닥을 닦고 홀로 있을 어린 아들을 걱정하고 있는 내게는 박사가 말하는 영원하고 옳은 진실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실감이 필요했다. 넓이도 없이 장엄하게 어둠을 뚫고 한없이 뻗어 나가는 한 줄기 진실한 직선. 그 직선이야말로 내게 잠시의 평온을 가져다 주었다.

“자네의 그 영리한 눈을 떠.”

박사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어둠을 응시했다.

사람이 사람, 혹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보통은 자신의 가치에 따른 추구라고 할 수 있는 이 행동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신이 가르쳐주는 ‘사랑’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외모’, 누군가에게는 ‘돈’, 누군가에게는 ‘신념’일 수 있다.

박사가 보는 세상의 기준은 보이는 사물 속에 숨은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수식과 숫자의 조합이다.

슈퍼마켓의 가격표, 문패에 적힌 번지수, 버스 시간표, 햄의 유효기간, 루트(박사가 지어준 ‘나’의 아들의 별명)의 시험 점수……. 그에게 있어 이 숫자들은 모두 표면적인 역할에 충실하면서 이면에 숨겨진 본래의 의미를 고집스럽게 견지하고 있다.

‘나’는 고용된 곳에서 냉장고를 청소하다가 사무실 바닥을 닦다가 발견한 숫자가 가진 개성을 찾아보면서 자신의 힘들고 소회된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다고 해서 생활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메마른 숫자 안에 의미가 담겨있듯이, 숫자로 대변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세계의 바탕을 이룬다고 ‘나’는 믿고 싶어한다. 이를 통해 지극히 평범하면서 보잘것없는 자신의 삶에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종이를 쓰다듬었다. 박사가 쓴 수식이 손끝에 만져졌다. 수식이 죽 이어지면서 한 줄 사슬이 되어 발치로 길게 늘어졌다. 나는 한 단 한 단, 사슬을 내려간다. 풍경이 사라지고, 빛도 비치지 않는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전혀 무섭지 않다. 박사가 제시한 도표는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정확성을 영원하도록 지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내가 서 있는 지면을 보다 깊은 세계가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나는 놀라고 감탄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사이.

메마르고 정확하며 냉정한 ‘보이는 것들’ 속에서 어떤 모습의 의미와 감성, 가치와 미를 담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며 살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불안정한 경제 상황과 치솟는 물가, 노후를 보장받는 제대로 된 직장을 얻기 위해 ‘고시’에 매달리는 수많은 20대의 미래를 바라보는 방식, 체형과 미모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다이어트 열풍, 스타벅스 커피에 열광하는 트랜드적 감성…….

요즘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것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나는 내 안에 어떤 방식의 세계를 형성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박사가 비록 일상 생활엔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할 지라도 이 세계를 ‘수식의 아름다움으로 짜여진’ 시선으로 사랑했다면 나는 어떤 시선으로 세상의 아름다움, 삶과 일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정답은 없을지라도 적어도 선택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