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치마를 너른 한 여인이 머리를 흩날리며 표지를 장식한다. 그녀를 둘러싼 쪽빛은 왠지 모르게 눈물겹도록 청초하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 불린 여인, 그녀의 이름은 덕혜옹주다. 사실 그녀의 이름은 우리의 기억속에서 사라져버린듯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낯설기만하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지고 조선의 황실이 무너지고 나라잃은 슬픔과 함께 잊혀지고 찢겨졌던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이 눈부신 쪽빛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라던 어느 시인의 시어들은 아마도 그녀를 부르는 이름인듯 하다.

'1909년은 그런 시대였다. 힘을 가진 자가 득세하는 세상. 권력의 그늘은 생각보다 안온했고, 일본에 빌붙은 개화파들은 왕실조차 뒤흔들었다. 고종은 한갖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 P. 17 -

나라를 잃었다는 자책감과 아픔, 그때마다 고종은 커피를 찾았다고 한다. 고종과 커피, 김탁환의 [노서아 가비]의 한 장면을 보는듯 고종은 오늘도 커피를 손에 든다. 아관파천, 헤이그밀사파견 등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한 고종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시계는 한반도를 야욕에 가득찬 그들의 발밑에 짖밟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 망국의 옹주로 태어난 그녀, 덕혜옹주가 간직한 아픔의 시간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본의 강제병합 100년을 맞은 2010년, 우리앞에 선 그녀에게 시선이 머문다.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일본은 조선 침탈에 대한 노골적인 야욕을 드러냈고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그들의 흉계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황실을 완전히 붕괴시키려는 그들의 야욕은 고종의 아들들을 일본에 볼모로 잡고, 황실의 마지막 옹주마저 인정하지 않으며 황적에 올리지조차 않고 있었다. 더불어 헤이그 밀사를 계기로 해서 강제로 고종을 폐위하게 되고 결국 고종의 독살이라는 끔찍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만다.

그곳에 이름없는 황녀가 살고 있었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막내 딸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족이었던 덕혜옹주의 삶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한 나라의 황녀로의 축복받은 삶이 아닌 잃어버린 나라의 옹주로써 그녀가 걸어야 했던, 우리의 기억속에 이름조차 낯설게 자리할 수 밖에 없었던 눈물겹고 가슴 시린 한 여인의 시간을 역사의 시계와 나란히 자리시키고 있다. 옹주는 황족이면서도 이름조차 얻지 못하고 억지로 일본인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녀야 했다. 1921년 그녀의 나이 12살이 되어서야 '덕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지만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야한다는 명목으로 1925년 일본으로 끌려가기에 이른다.

'서슬 퍼런 일본 순사를 단숨에 다스리던 위엄과 당당하고 흔들림 없는 태도, 천한 것을 어루만질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 복사꽃처럼 환하고 고운 얼굴... 멀리서 우러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 P. 119 -

망국의 황녀 덕혜옹주, 그녀에게 일본에서의 시간은 아픔의 연속이었다. 조센징이라는 꼬리표는 그녀는 따라다녔고 그 속에 담긴 비웃음과 멸시는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했다. 하지만 옹주는 끝까지 꿋꿋하고 당당했다. 그녀에게 찾아든 비보, 오라버니 순종황제의 붕어와 어머니 양귀인의 잇단 죽음 등 덕혜옹주는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하지만 이런 커다란 아픔으로부터 그녀는 '자신의 상처는 자신이 핥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몸소 체득하게 된다.

조선땅에 있을때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친일파 한창수는 일본까지 건너와 그녀를 일개 대마도 번주의 양자와 결혼시키려 한다. 결국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기에 이르고 의도치 않게 아이가 생기게 된다. 아이의 이름은 '정혜', 하지만 아이가 커가면서 아이는 정혜가 아닌 '마사에' 라는 이름으로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끝까지 황실의 예법과 조선말을 가르치려했던 옹주, 일본인일수도 조선인일수도 없는 아이와의 계속되는 갈등, 그렇게 옹주는 흔들리는 시간속에 외로이 홀로 놓여지게 된다. 외롭고 쓸쓸했던,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삶을 걷게 되었던 조선 마지막 황녀, 그녀가 걸었던 아픔의 시간속을 우리는 그렇게 눈물속에 동행한다.

<덕혜옹주>는 옹주의 비극적이고 가슴 아픈 시간을 큰 줄기로 하면서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서 또 다른 작은 이야기들을 이끌어간다. 옹주에게 목숨을 구하고 그녀의 곁을 지켰던 복순, 친일파 갑수와 그의 동생 기수, 옹주와 정혼했던 김장한과 그림자 사나이 박무영, 그리고 옹주를 구출하려던 그들의 계획... 많지 않은 등장 인물들이지만 옹주의 파란만장한 삶속에 녹아들어 가슴저린 감동과 슬픔을 전해주고 있다.

잊혀졌던 인물이 역사의 시간을 뚫고 되살아났지만 조금은 아쉬운 점들도 눈에 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던 소설의 평범한 전개가 조금은 아쉽기도 했고, 박무영이라는 캐릭터의 다소 소극적 활약상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에피소드들의 구성상 치밀함이 조금은 더 두드러졌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기도한다. 또한 초반을 장식했던 갑수라는 인물의 작품속 비중이 무엇일까? 의문을 갖게하게 되기도.... 역사속에서 새로운 인물을 불러내는 일은 물론 쉽지 않은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 주는 치밀한 구성과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이 살아나야만 재미도 감동도 더욱 견고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대한제국의 옹주로서 부족함이 있었더냐... 옹주의 위엄을 잃은 적이 었었더냐... 나의 마지막 소망은 오로지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었느니라...' - P. 403 -

'조선의 백성들을 가르치고 키워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 덕혜옹주의 바램이었다. 아픔과 슬픔속에서도 언제나 조선의 마지막 옹주로서 굳건하고 당당했던 그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오로지 '자유롭고 싶다'라는 그 작은 소망을 이루기까지 그녀는 그렇게 길고도 험난한 시간을 걸어올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아직도 그녀는 자유롭지 못할지도 모른다. 조국에 오려고 했던 그녀지만 왕실재산을 국유와하고 의도적으로 왕족을 천대했다는 이승만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은 '덕혜옹주가 누구냐?'고 되묻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무관심과 냉대속에서 덕혜옹주, 그녀는 아직도 자유롭지 못할지도 모른다.

덕혜옹주의 남편이었던 다케유키의 친구는 이런 말은 한다. '우리는 승자일세, 승자는 너그러워야 하네.' 왠지 이말에 가슴이 무거워진다. 우리는 언제쯤 너그러워질 수 있을까? 언제쯤 승자의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때만되면 들려오는 역사를 뒤집고 비웃는 일본의 억지에 들끊는 패자의 시간이 아니라, 이제 엉크러진 역사를 말끔하게 정리하고 아픔을 씻어내며 승자는 아니더라도 다시금이 바로 지금이다.

덕혜옹주가 그토록 꿈꾸던 자유의지, 이제는 우리가 기억하고 간직해 잊지 않으며, 후손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어야겠다. 아픔의 시간을 걸었지만 이제는 우리의 기억속에 되살아나 자유롭게 날갯짓하는 덕혜옹주의 모습을 꿈꾸어볼 수 있을것 같다. <덕혜옹주> 이 작품으로 하여금 역사의 시간속에 비추어 슬프도록 푸르르던 그녀의 쪽빛치마가 더이상 눈물이 아닌,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자유의 상징인 푸른 하늘색이 되었음을 의심치 않는다. 너는 눈부시지만 이제 더이상 나는 눈물겹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