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서울 삼성동에서 서울 국제도서전이 열렸다. 국내외의 많은 인사들이 초청되었는데, 그 중 에쿠니 가오리가 한국의 소설가와 대담을 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에쿠니와 대담을 했던 소설가가 바로 정이현. 그 때 나는 다소곳하고 나긋나긋해 보이는 외모와는 대조적으로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말하는 그를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행사가 끝나자마자 서점에 들러서 그의 대표작 <달콤한 나의 도시>를 들춰봤다. 주인공은 30대 여성. 찌릿한 사랑도 없고, 그렇다고 그럴 듯한 연애 상대자조차 없는 그가 만남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번민하는 앞부분을 읽으면서 식상한 연애 소설인가 싶어 책을 덮었다. 아직은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고 말이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그 책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래, 어디 한번 끝까지 읽어볼까' 싶은 마음에 냉큼 빌렸다. 그런데 막상 다시 읽어보니 전에 섣불리 단정했던 것보다 다채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었고 생각해 볼 거리도 많은 소설이었다. 이는 소설의 힘인가, 아니면 서른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 때문인가. 음, 역시 소설의 힘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점점 더 혼란스럽다. 나는 정말 서른두 살의 나이인가? '서른두 살스러움'의 기준, '서른두 살적인 사고방식'의 기준은 대체 누가 정하는데"? 한 개인이 일상의 지층을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에 처했을 때에 그런 소속 집단에 대한 선입견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소속 집단의 규범에 의지하여 머리가 빠개지도록 고민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에게 나는, 우주 속의 유일한 개체. 새끼발가락에 티끌만 한 가시가 박힌대도 단독의 고통을 감내하며 작은 방 안을 홀로 뒹굴어야 한다. (p.432 9부 정거장, 서울)
 
  
 

주인공은 30대 초반의 여성 '오은수'. 평범한 대학을 나와 작은 회사를 다니고, 꿈도 없고 애인도 없으며, 별다른 재주도 없고 어디 모난 곳 또한 없는 '평범 그 자체'인 여성이다. 그런 은수에게는 전 남자친구가 결혼하는 날에 함께 있어줄 친구 유희와 재인이 있고, 친구인지 애인인지 헷갈리는 유준, 마음은 끌리지만 냉큼 가질 수는 없는 연하남 태오, 그리고 80점짜리 맞선남 김영수가 있다.

 

은수에게는 두 차원의 나이가 있다. 하나는 진짜 나이(절대적 나이). '베프' 유희, 재인과는 어떤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해도, 자다 깨서 운동복 차림으로 만나도 괜찮다. 가족과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열일곱이든 서른두 살이든, 중요한 건 '오은수' 그 자신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나이(상대적 나이). 은수는 일곱살 어린 태오를 만날 때는 짐짓 어른인 체 하고, 다섯살 많은 영수를 만날 때는 조신하고 참한 신부감인 양 행동한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상사에게는 고분고분한 부하직원, 후배에게는 조금은 비겁할지 몰라도 세상물 더 먹은 선배다. '오은수' 자신보다 그의 나이가 앞서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설 속에서 은수가 고민하는 문제들은 두 차원의 나이를 넘나들면서 정체성이 불안해지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익숙한 사람들과 있을 때의 인격과 사회적 관계로 알게 된 사람들과 있을 때의 인격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은수는 자신의 문제를 두고 고민할 겨를이 없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사랑을 알 수 있으랴. 은수가 여러 남자들을 두고 재는 것도 결국 그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능이나 욕망, 감정보다는 '나이'라는 어설픈 잣대로 판단하느라 골치가 아팠던 것이다.

'나이'라는 시간적 관념을 중심에 두고 보면, 소설 속 인물들 모두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함을 알 수 있다. 은수도 바뀌고(싫어했던 우거지까지 좋아하게 된다), 재인과 유희도 사회적 처지와 가치관이 바뀐다. 백수였던 태오와 유준은 직업을 가지고, 영수는 사람 자체가 바뀐다.

 

이에 반해 도시라는 공간적 배경은 늘 고정되어 있다. 인물들은 여행이든 가출이든 잠시 도시를 떠나더라도 금세 돌아오고, 태오처럼 다시 돌아올 것을 예정하기도 한다. 결국 세상을 규정하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축 중에서 당장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시간이지만, 긴 시간을 두고 봤을 때는 공간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제목도 달콤한 나의 '도시'.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먼지처럼 작은 인간이 시간의 무게를 버틸 수 있는 건 불변하는 것의 가치 덕분이라는 진리를 다시금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