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아내의 마지막 기도 - 채형복

 

p28 아버지 1

그날

아버지는 육신을 버리셨다.

여든아홉 굴곡 많은 아버지의 역사도 쓰러졌다.

 - 나는 한 백 살까지 살지 싶다.

쑥스러운 너털웃음은

텅 비어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늘 곁에 계시리라 믿었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

앞에서

못난 자식이 할 수 있는 일은

때늦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뿐.

 

빈소를 모신

방

즐겨 쓰던

중절모, 시계는

옛 주인을 기다리고

때 묻은 자개논에는

천 년의 학들이

혼백과 놀고 있다.

 

이 밤

아버지는

허방(虛方)의 공간에서

자유를 얻으셨는가.

 

p30 아버지 2

아버지는 무서웠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얘기했다.

연세를 더할수록

아버지는 말씀이 많아졌다.

듣는 척했지만

사실은 모두 흘려들었다.

외로움을 드러내는 것이라 알았지만

애써 외면했다.

휴대폰 화면에

'아버지' 이름 석 자가 뜨면

절로 긴장되었다.

대화는 사무적이었고

짧았다.

중년이 되고

사회적 지위가 확보되면서

나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꾸중하는 이는 없었다.

오직 아버지만이 하실 수 있었다.

아버지는 늘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늘 허허로움을 느낀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하고

울컥 설움이 밀려온다.

태연한 척하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눈물이 맺혀 있다.

왜 그렇게 무서워만 했을까.

살아생전에는 한 번도 안아 드리지 못하고

왜 수의 입고 누워계신 몸을 안고서야 눈물을 흘렸을까.

때늦은 후회는 파도처럼 밀려오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이 어리석음을 엎드려 빕니다.

 

p32 늙은 아내의 마지막 기도

아들이 왔습디다.

억지웃음 아래 스치는 진한 슬픔을 보았지요.

당신이 쓰러졌다고

이승을 여의었다고

자식들의 걱정은  단 하나

내가 충격을 받지나 않을까

나를 졸지 간에 읽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라고.

걱정 마라.

사람이란 한번 나면 언제가는 죽는다고

아버지는 좋은 세상에 가셨을 것이라고

위로하며 아들을 돌려보냈지요.

마음이야 곧장 당신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굳어버린 두 다리는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지요.

통곡하며 울고 싶었지만

병실의 환자들에게 폐를 끼칠까 봐 울 수도 없었다오.

그러나 속으로 흘린 내 눈물이 큰 강을 이룬 것을 이녁은 알겠지요.

지난밤

당신이 환한 웃음으로 병실로 와서는 따라오라 손짓했어요.

나는 아들의 등에 업혀 바람을 가르는 살처럼 달려갔다오.

당신은 한마디 말도 없이 무덤에 눕습디다.

하여 나는 두 손으로 당신의 양 볼을 감싸 안아 눕히고는

가만히 귓속말을 했지요.

나를 찾아주어 고마워요.

당신을 사랑했어요.

이제 편안히 가세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가세요.

안녕, 내 사랑!

 

p44 아이의 아빠

아이는

하루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꿈속으로 안고 가버리나 봅니다.

볼그스레 상기된 잠든 얼굴

어디에도 삶의 회한이나

슬픔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잠 속에서 꿈꾸고

꿈속에서 깨어나는 것일까요.

마치 버들강아지처럼

초승달처럼

추위와 어둠을 양식으로 하는.

아이는

웅크리고 자지 않습니다.

몸이 가는 대로

마음이 생기는 대로

억지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아이의 아빠인 나는

이래라저래라

아이를 가르치지만

실은 쓰일 데 없는

허식을 강요할 뿐인지도 모릅니다.

본래 순일한 아이를

오히려 더럽히지나 않는지.

아이의 아빠인 나는

더럭 겁이 납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하루해가 저물어

또다시 밤이 됩니다.

아이는 꿈꾸고

아빠는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p 52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

자식일 때는 귀에 닿지 않았다.

고집대로 행동하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부모님의 무너지는 가슴은

안중에도 없었고

헤아릴 여유도 없었다.

부모가 되어 겪어보니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

가슴 아리도록 와 닿는다.

자식일 때 겹겹이 쌓은 업보를

부모 되어 갚아간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위로하며

나는

오늘도

참고

기다리고

이해하고

사랑한다.

부모이기에

자식이기에

 

p62 막힌 골목에서

살다 보면

숨이 턱 하니 막히는

막다른 골목을 만나곤 합니다.

눈앞은 캄캄하고

그만 털썩 주저앉고 싶지요.

엉엉 목놓아 울고 싶어집니다.

 - 내 인생은 왜 이런가?

자책하고 절망합니다.

더러는 쓰린 속으로

소주잔을 기울입니다.

비틀비틀 취한 채로

세상의 거대한 장벽을 들이박고 싶습니다.

 - 아, 이대로 잠들어 버렸으면...

나를 가로막고 있는 그 벽에 기대어

영원히 잠들고 싶습니다.

깨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참담하고 격정적인 시간이 지나면

다시 현실이 보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눈들이 보입니다.

연로하신 아버지, 어머니,

연민을 가득 담은 아내와 아들의 눈이 보입니다.

눈은 백 마디, 천 마디의 말보다 따뜻합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의 원천입니다.

 - 아들아, 너를 믿는다.

아버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 여보, 힘들죠? 사랑해요.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 아빠, 힘내세요. 제가 있잖아요.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막힌 골목에서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봅니다.

다시 일어섭니다.

이제

막힌 골목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이 됩니다.

절망과 좌절이 아니라

희망과 상생의 공간이 됩니다.

막힌 골목은

나를 살리는 숨구멍입니다.

 

p76 내가 슬퍼하는 것은

내가 슬퍼하는 것은

인생이 짧아서가 아니다.

허무해서도 아니다.

진리와 도를 얻지도 깨치지도 못할까

걱정이요,

그 노력을 그만두고 말지나 않을까

아무런 목적도, 희망도 없이

청춘을 낭비해버리지나 않을까,

하여

슬프고 애가 탄다.

 

내가 아파하는 것은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가 아니다.

돈과 명예를 가지지 못해서도 아니다.

물질과 허세에 목매일까

근심이요,

인간이 되고자 하는 내 꿈을 포기하지나 않을까

세 치의 혀와 말만을 앞세워

나와 남을 속이지나 않을까,

하여

피멍든 가슴으로 아파하는 것이다.

 

p124 이제 사람이 되려나보다

젊을 때는 그랬다.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다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고

선악과 시비를 따지고 들었다.

지식이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논리와 과학을 신처럼 받들었다.

무엇이 논리적이고 과학적인지

모르면서도 안다고 믿었다.

다만, 그뿐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젊을 때는 그랬다.

자식 잘되라고

정한수를 떠놓고 보름달을 향해 기도하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신이라며 힐난하고 무시했다.

논리와 과학을 넘어선

모정(母情)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비인간적이었고 모진 아들이엇다.

다만, 그뿐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인생보다 더 훌륭한 스승은 없다.

젊어서 깨닫지 못하면

세월이 채찍으로 후려치며 가르친다.

나이 들어 온몸으로 참회하며 배운다.

잘 낫다고 으스대며 남들을 무시하고

교묘한 언변으로 우쭐대던 나는

어.리.석.었.다.

보름달을 보면

자식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두 손이 보인다.

이제 사람이 되려나 보다.

 

*** 2013년 8월 26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