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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운명같은 강렬함이 없다, 셜록홈즈의 스릴 넘치는 긴장감도 없다. 류소영의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저 뜨거운 태양아래 이름모를 어느 시골길 논두렁에 무심하게 심어놓은, 지칠대로 지쳐 커튼마냥 추욱 늘어져 버린 호박잎을 보는듯한 무심함이 묻어난다. 그런 호박잎을 떠올리니 찰박찰박 물소리가 들리는듯도 하다....

12년 만에 선보이는 류소영작가의 두번째 소설집은 여덟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작가가 없는 듯하지만 주변에 꼭 하나씩 있는 '희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듯 책의 마지막장을 넘기고도 한참을 되뇌이게 만드는것 보면

'기억하니.....기억나니.. 생각나니...' (p.120) 라고 물으면서 작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나타난것 같았다.

저번달, 아니 엊그제 본 뉴스에서 죽일놈, 못된놈 하면서 흥분하고 혼자 열 내다가도 오늘, 꾸벅거리는 지하철에서 졸음한방에 잊혀버린 그 수많은 이슈들 중에서 언젠가 들었을법한, 아니, 괜시리 내일처럼 안타까워 했을수 있는 첫번째 이야기 물소리의 J군 수몰예정지역 . 이 이야기는. 이제 곧 사라지게 되는 마을의 적막한 풍경을, 흔적을 눈에 넣고, 먼 훗날 찰박대는 물소리아래로 무덤처럼 변해있을 기억을 미리 과거형으로 기약 한다. 어쩌면 이제 모두 다 뿔뿔이 흩어져 그곳에 살았던 기억도 가물한 사람들이 되어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느 소설집보다 조금은 작게 만들어졌다 싶은 이 책의 표지에는 누군가 먹으려고 봉지를 뜯다가 홀라당 놓쳐 떨어뜨렸을것같은 시원한 아이스바가 그려져있다. 이제 막 녹기시작했을것같은데 그 위에 떡~하니 눈에 잘 뵈지도 않는 아주 작은개미가 몇십배는 클것같은 이 아이스바를 다 먹어치울 기세로 붙어있다. 자꾸만 실제같아 손가락으로 튕겨내고 싶은 고약한 심리를 드러내지만 이 개미는 실로 폭식증이라는 거식증과 대식증의 요소를 모두 다 갖고 있는 더 슬프고 괴로운 병을(p.45) 가지고 있다. 살아있는 존재라는 걸 부끄러워하는것 같은 작고 작은 여인(p.47) 신주연의 이야기이다.

개미를 좋아했고, 귀엽게 행진하는 그 개미를 한마리씩 입에 쏙쏙 집어넣다가 엄마에게 들키고나서 짐승이라는 소리를 들었을때부터 시작된 병인듯 싶다는 그녀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녀에게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어떻게든 계속 알고 지내야하는 사돈지간의 사람을 회상하는 두번째 이야기. '개미, 내 가여운 개미'에서 그저 많이 먹는다 혹은 유난히 적게 먹는다라며, 곱지않은 시선을 보낸 우리 주변에 먹을것에 대한 이런저런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의 슬픈 몸짓을 떠올리게 했다. 그들이 나에게 피해를 준것도 없고, 내가 먹으라고 보태준것도 없으며, 먹지말라고 위로를 해준적도 없는데 나와같은 곱지않은 시선을 받아내는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어쩌면 그런 자신이 제일 싫었을텐데....

다 먹지도 못할 아이스바에 올라간 개미처럼 그 얼마나 가여운가...

자꾸 자꾸 읽어갈수록 이 책에 나의 지난 잔상들이 진해져간다. 그때 그 사람, 그랬던 그사람들. 그리고 잠깐 스치듯 오래? 옆에 있었던 사람들..

세상에서 제일 가고싶지 않은 곳은 시월드라는 친구들의 푸념. 그런 시어머니의 가출로 서로의 책임으로 떠넘겨버리고 그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이야기 '또 밤이오면'.

남편마저 자신의 어머니가 동네창피함으로 비춰질까 집히는것 없냐고 아내를 닥달한다. 항상 같이 살지만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고싶은 사람들. 그렇게 있는듯 없는듯 하루하루 무사히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가족이든 친척이든 친구이든 가까운 관계선상에 있는 사람들이 잊혀지길 바라는 경우는 아마도 내안의 무관심과 남들의 관심속에 있는 창피함때문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결국, 가출한 시어머니는..... 전화벨이 울리면 발소리 크게 울리도록 느리게 뛰는 며느리는.... 지금 이순간 나의 주변을 쓰윽 둘러본다...

어디서 찾아냈는지 작가는 아~~, 맞다.. 그래,그래. 이런사람들이 있었지..라고 혼자 중얼거리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듯 하다. 나의 회사 어딘가 있을 옷 잘입는 여자이야기. 윤세연. 멋드러진 커리우먼이 아니라 '낙심한 눈매와 축 처진 볼, 다듬은 지 오래된 것 같은 머리칼..... 평균적으로 세련된 옷차림과 슬프게 부조화하고(p.107) 있는 그런 여성. 어쩌면 나를 보고 글을 쓴것같은 착각을 일게 하는 작가가 살짝 무섭기도 하다.

전기세 많이 나온다고 엄마의 잔소리 폭탄에 무작정 가출한 27살 백수의 이야기. '기록'. 백수가 그렇듯 갈데도 마땅치 않은데 돈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담배쩔은 pc방이나 이러저리 치이며 잠을 자는 찜질방은 가기싫어 '입안에 빨대 많이 꽂아 넣기'대회에 참가했다 일등을 해버린... 그러면서 그 일등의 순간도 담담하고 슬프고 피곤한 취업준비생의 이야기. '하아...~'

그저 같이 한숨을 쉴수밖에 없었다.

여동생을 친구에게 소개시켜주기 위해 '없는듯 있는 여자'라고 말하는 오빠.

쿠션에 수도 잘놓고, 달리기도 잘하고, 거짓말이나 허세도 안부리고, 춤까지 잘추는 여동생을 그렇게나 잘 알고 있으면서 없는듯 있는듯 하다니.. 문득, 나의 가족이 나를 누군가에게 소개할때 어떻게 말할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가족을 누군가에게 이렇게 자세히 소개할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빠져보기도 했던 이야기이다.

허니문의 달콤함과 환상을 가지고 여행을 온 사연많은 신혼부부들 이야기. 새로 한 핸드폰번호로 이전 주인의 기억, 일상들이 전해져오는 이야기. 작가는 불완전한 사람들의 모습을 덤덤하게 문득 기억난것처럼 그려내는듯 했다. 누군가의 기억속에 내가 될수도 있고, 내 기억 깊은 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같은 이 책은 오랫동안 먼지 탈탈 털어 내고 꺼내든 해묵은 사진첩 같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한시도 손에 놓지않고 애지중지 중독 되어버린 스마트폰속에 잠든, 이름 석자뿐인 번호로 남겨진... 나의 일상에서 희미해져 간.... 한때는 열렬히 좋아했고, 존경했고, 도움을 받았던 소중한 인연들에게 이렇게 말하려고 한다.

" 제가 좀 좋아해도 될까요? 뭐, 허.....허락받을 만한 일은 아... 아니겠지만서도.." 라고. (p.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