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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책을 많이 읽는다고 주위에서 인정해줄 정도인데, 가끔 나의 독서를 부끄럽게 만드는 책들을 만날 때가 있다. 독서법 혹은 서평을 모아놓은 책들을 자주 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책들은 종종 나의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번 출장 길에 만났던 이 책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역시 그러한 책 중 한 권이었다. 출장 가기전 읽고 있던 모방범 2권을 들고 갈까 고민하다가 출장 당일 일어나서 들고가기로 결정했던 책이다. 회사 일로 너무 힘들었을 때 그녀의 전작이 큰 도움이 되었고 그녀의 글이 잘 맞는다고 생각되어 신작이 나오자 마자 사두었는데, 그녀가 다룬 책들 중 읽지 않은 책들이 대다수라 선뜻 책을 펼치지 못 했다가 이제서야 손에 들게 되었다.

내가 겪는 것들과 비슷한...이를테면, 사건, 감정, 상황을 겪는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다. 그리고 이러한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사람은 더 좋다. 이 책의 저자인 곽아람 기자는 딱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아마 나와 비슷한 또래인 수많은 사람들이 또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젊은 20~30대 직장여성이 고민하고 생각했을 법한 일들을 그림과 연결하여 이야기를 자아내던 그녀가 이번에는 그녀가 지금까지 읽어온 책들과 그림 그리고 그녀의 경험을 묶어 글을 썼다.

감명 깊게 읽은 책 속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다가 거기에 걸맞은 그림들을 대입해 내계의 깊숙한 곳에 고스란히 저장해 놓는 것은 나의 오랜 독서 습관이다. 살밍 버겁고 힘든 날이면 고용히 내 안으로 기어들어가 한 구석에 웅크린 채, 쌓여 있는 이미지들을 꺼내 하나의 내면의 스크린에 비춰보곤 한다. 그것이 내가 삶을 견뎌내는 하나의 방편이다. - 글머리에 중에서

얼마나 멋진가- 이 책을 읽는 내내 왜 난 같은 책을 읽으며 그녀처럼 이 책을 온 마음에 담지 못했는지 분했다. 그림이야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라 그렇다쳐도 책은 달랐다. 토지의 구석구석을 기억한다. 책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생활의 일부분으로 곁에 있었다. 초등학교에 막 들어갔던 1980년대 중반, 지식 산업사에서 출간됐던 세로쓰기 본의 토지를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탤런트 최수지가 주인공 서희 역을 맡았던 드라마를 보고 어린 서희를 괴롭히는 조준구에 대한 분노를 일기장에 표출했던 초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를 기억한다. (중락) P.29 왜 나에게는 이런 소설이 없었을까- 나의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있는 책, 읽을 때마다 다른 것이 보이는 책-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는 더욱이 두번 이상 읽은 책이 거의 없기에 나로써는 이런 그녀의 독서가 무척 부러웠다. 처음에는 그 매력을 모르다가 빠져들게 된 소나기, 알퐁스 도데의 소설, 그리고 어린 왕자는 또 어떠한가- 어떤 책을 어느 시기에, 어디서 읽느냐는 그 책을 만끽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하지만 그녀가 인용한 모든 글귀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인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읽어보지 못해서 그리고 그저 내가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적은 글로 인해 몇번이나 시도했던 데미안이 새롭게 보이고, 내가 전혀 모르던 최인훈 작가와 오정희 작가의 소설을 읽어야할 책 목록에 올리게 되었다.

이 책의 또 한 축인 그림에 대해서는 많이 말할 것이 없다. 이 책에서 그녀는 그림에 얽힌 이야기나 배경이 책과 전혀 상관이 없더라도 (심지어 전혀 엉뚱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자신이 읽은 책의 삽화로 들어갈 법한 그림들을 골라보여준다. (물론 실제 그 그림의 의도나 배경 역시 착실하게 들려준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참 기가막히게 책과 어울려 그녀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앞서도 말했듯 이 책을 읽고 나의 독서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았다. 다행히 이번 출장길에서 읽은 이 책은 매일 밤 조용한 호텔방에서 오롯이 읽어낼 수 있었다. 간간히 양치질을 하면서 읽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꽤 긴 시간을 투자하여 이 책을 이틀만에 읽어내렸다. 그렇게 책을 읽은 것이 얼마만이더라... 늘 틈새 시간을 내어 책을 읽고 간혹 내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심지어 책을 읽기보다는 사들이기에 더 열심이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래도 연말에 이 책을 읽어 참 다행이다- 새해에는 독서, 아니 모든 일들을 작가처럼 좀 더 마음으로 느끼고 간직하고 싶다. 그래서 내년에는 단순히 책을 읽는 행동이 아니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생각과 느낌이 조금 더 자랐다고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겠다.

P.S. 한 책과 그림이 시작되기 전 책과 그림의 작가에 대한 저자에 대한 아주 짧막한 이야기가 있는데, 지극히 주관적으로 씌어진 이 글들이 난 또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모든기다림의순간, 나는책을읽는다, 곽아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