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에는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의미 있는 행위이다. 아무리 섹스하는 사이라도 별개의 인격이라는 사실을 바꾸지 못하는 두 사람이, 매일같이 똑같은 음식을 똑같이 몸속으로 집어넣는다는 행위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알렌테주, 에쿠니 가오리

에쿠니 가오리, 키쿠타 미츠요... 한 때 일본소설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이름만으로도 설레일법한 책이었다. 거기다 음식과 관련된 짧은 소설 모음집이라니... 예쁜 표지와 귀여운 제목 역시 이 책을 탐나게 했던 이유였다. 결국 유혹을 뿌리치지 못 하고 이 책을 받아들었다. 

일본 소설가들이 썼지만 이 소설들의 무대는 바로 유럽이다. 그것도 다소 생소한 지방들. 첫번째 이야기 '신의 정원'은 스페인의 바스크, '이유'는 이태리의 피에몬테, '블레누아'는 프랑스의 브루타뉴, 그리고 마지막 '알렌테주'는 포루투갈의 알렌테주를 배경으로 한다. 신의 정원에서는 어머니가 병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즐기는 것을 이해 못하는 주인공이 고향을 떠나 살다, 결국 음식으로 모든 걸 나누던 가족을 이해하고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똑같다. 도망치고 도망쳐서 이제 완전히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 가족의 일원이다. 엄마가 만드는 일상적인 음식과 아버지가 만드는 화려한 요리 그리고 친척들이 함께 둘러쌌던 식탁은 어쩔 수 없이 내 안에 존재한다. 그런 것들로 내가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안도도, 우리는 느끼기보다는 맛보며 살아왔다. 식탁에 올리고 모두 함께 그 식탁에 둘러 앉아서. 그렇게 함께 나눠 왔다. 그게 올바른 일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방법밖에 모른다. 나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해한다. 그 날의 일을. 아버지를. 그런 방법밖에 모르는 어른들을. - 신의 정원, 기쿠타 미츠요

두번째 이야기 이유는 다소 난해한 이야기였다. 그나마 익숙한 미네스트로네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뻘 되는 남편과 자기와 동갑인 그의 딸... 그리고 그들의 갈등 구조가 공감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이야기였다. 블레누아에서는 미신을 강하게 믿는 지방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그러한 풍습과 또 그러한 풍습에 물든 엄마를 이해하지 못해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그 역시 자신을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나지만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고 엄마와 화해 한다는 이야기이다. 

살기 위해 먹는 사람들. 먹는 것에 도락을 추구하지 않고 매일 같은 음식을 먹는 사람들.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지금의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 아니 1년에 한 번이라도 괜찮으니까 일상생활의 얽매임에서 해방되어 남의 손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며 한숨 돌렸으면 한다. 정말로 편안하게 즐겼으면 한다. 지금이라면 이런 내 마음에 어머니도 귀를 기울여 주실까? - 블레누아, 모리 에토

마지막 이야기이자 에쿠니 가오리가 쓴 알렌테주는 처음에 다소 어리둥절해졌던 이야기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으니... 바람을 피운 남자와 여행을 떠나는 여자 그리고 호텔에서 만나게 되는 주인장과 어린 아이. 서사를 중요시 하는 내게 4편의 이야기는 모두 낯설었고 이해하는데 조금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편에 등장하는 음식 혹은 음식을 먹는 장면에 대한 묘사들은 충분히 매력적으로 충실하게 씌여있었다. 

양파, 셀러리, 토마토, 주키니 두 종류, 파프리카에 강낭콩. 모두 우리 밭에서 거둔 채소들이다. 아주 약간의 소금만으로 간을 한다. 큰 냄비에 한가득 담긴 미네스트로네. 채소를 핸드믹서로 가는 것은 카를로가 자라난 몽펠라트 집안의 방식이다. - 이유, 이노우에 아레노

설탕과 달걀노른자, 거기에 설탕에 진하게 조린 당밀 맛이었다. "철저하게 건강한 음식이네. 대지의 맛이야." 마누엘도 덩달아 말했다. "먹는 데 힘이 필요하군." 만약 마누엘이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면 나의 플라비아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맛'이라는 그 과자 하나를 도저히 끝까지 먹지 못했을 것이다. 다 먹고 나자 뼛속까지 설탕조림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온몸이 튼튼해진 느낌도 들었다. - 알렌테주, 에쿠니 가오리

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는 앞서도 말했듯이 내 생각과는 많이 달라 다소 당황했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이 책을 펼쳐들었을 때 이 책의 매력이 어디있는지 느낄 수 있다. 한 때 느꼈던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대화, 이야기가 사실은 이 책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었다는 것. 다소 엉뚱하고 쌩뚱맞지만 친절하고 섬세한 설명에 나도 모르게 그 자리를, 그 대화를, 그 음식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 

뭔가 쉽고 편한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이 책은 뭔가 기대에 어긋난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 작가 특유의 묘사가 그립다면 선뜻 건네주고 싶은 그런 책이다. 예쁜 포장 속에 기대치 못한 달디 단 화과자가 들어있듯 처음엔 생소할지도 모르지만 하나 둘씩 맛보는 사이, 이 책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 이 책의 리뷰는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읽고 썼습니다.

치즈랑소금이랑콩이랑, 에쿠니가오리, 모리에토, 이노우에아레노, 기쿠타미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