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팽두부

 

  내가 처음으로 추사고택을 갔던 것은 1996년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당시 석사과정에 다니는 대학원생이었고, 학술답사의 일원으로 학부 후배들과 함께 예산 언저리를 훑고 있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들어갔던 추사고택은 안온했다. 기억 속의 그날 후배들의 재재거림 속에 추사고택은 아련하고 따사로왔다. 그날 나는 괜히 멋있어 보이려고 했는지 알지도 못하는 추사의 글을 읽는 척했던 것 같다. 아마 한자 공부를 하던 끝자락이어서 일부 글을 읽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추사고택은 나에게 젊은 날의 치기와 눈 뜨기 어려운 봄날의 아련함으로 남아 있었다. 

  2009년 어느 봄날. 나는 인솔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데리고 추사고택으로 다시 향했다. 내 기억 속은 그날을 다시 만나볼 요량으로 가슴이 설렜다. 기억 속의 후배들보다 더 재재거리는 학생들을 앞세우고, 가만히 고택으로 들어간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고택 그 어느 구석에서도 10여년 전 그날의 아련함은 찾을 수 없었다. 고택 이곳저곳에 걸려있는 편액과 대련은 마치 옷을 벗은 채 쇼원도에 멋적게 서 있는 마네킹 마냥 불편해 보였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와 있는지 잊은 채 서로를 디카로 담기에 여념없어 보였다. 일찌감치 놀거리가 떨어진 학생 하나가 나에게 물었다. "교수님, 여기는 왜 이렇게 좁아요?"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왔다. 

  그렇게  20대의 나와 어긋난 후, 나는 머릿속에서 추사고택을 지웠다. 가족들이 예산으로 놀러가자고 해도 거기는 볼 게 없다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추사와 추사체에 대한 맹목적인 존경도 거두었다. 신격화된 수많은 위인 중 하나일 것라고 치부해 버렸다. 유홍준 선생님이 쓴 '완당평전'도 책꽂이에 그냥 방치해 두었다. 마치 유배를 보낸 듯이.

  2009년 12월 추운 어느날 나는 완당평전을 읽기 시작했다. 왜 읽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분'이 부르시듯이 '그 책'이 나를 불렀던 것 같다. 몇날 며칠을 꼭꼭 씹으며 완당 평전을 읽었다. 빨리 넘어가는 책장이 야속해서 자꾸만 머뭇거렸다. 완당 선생의 과천 시절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눈물이 났다. 겨우 사십 줄을 산 내가 인생을 무어 알겠냐만은 완당 선생의 대팽두부(大烹豆腐)를 읽으며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최고 가는 좋은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최고 가는 훌륭한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인생의 참된 모습은 이렇게 소박한 것인가 보다.  완당평전의 마지막 장을 덮고, 한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 막 살붙이 한 사람을 떠나 보낸 것 같은 아픔과 전율이 밀려왔다. 

  완당평전을 읽은 지 2-3주가 지난 것 같다. 그 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완당, 완당'했으니 주변 사람들이 귀가 좀 아팠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추사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네들에게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추사체가 추사의 고매한 정신을 담은 그릇이라는 점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2010년 따스한 봄날 사랑하는 아내와 딸 아이의 손을 잡고 추사고택에 다녀올 것이다.  

완당평전, 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