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이 후 12년만의 시집이다. 대학 때 서고에서 좋아하던 시를 노트에 필사하던 때 그의 시가 좋아서 샀던 시집이 아직도 있다. 아이들 책에 밀려 정리함 속에 담겨있던 책을 꺼내어 다시 읽어 봤다. 퀴퀴한 냄새가 나던 서고 한 구석. 열심히 다이어리에 시를 필사하던 풋풋한 대학생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이내 나는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찬비에 젖어도 새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말 한 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마른 낙엽처럼 잘도 타오른 나는
혼자 뜨겁게 사랑하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뿐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15p
지금 대학생들에게는 고루한 감성처럼 다가오리라. 혼자 뜨겁게 사랑하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뿐이라니.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누가 더 좋아하나 계속 '썸'만타는 사이. 그러다 ‘필’이 통하면 하룻밤 정사도 마다하지 않는 요즘 세상에는 구닥다리, 촌티 풀풀 나는 혼자만의 사랑. 거칠 것 없었던 시절에는 그의 시가 답답했다. 나의 청춘도 그 당시에는 요즘세상이었으니. 왜 더 다가가지 못하는지. 꼭 자신이 홀씨가 되어 바람이 그녀 곁으로 불어오는 것만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왜 스스로 바람이 되어 가지 못하는지 말이다. 도대체 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풋내 나는 시절이 가고 지금 다시 시집을 펼쳐보니 청춘시절의 용기와 패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발자국도 옴짝달싹 못하는 나를 본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숨 쉬고 있지만 그저 삶을 연명하기 위해서다. 심장이 찌르듯 아프거나 두근거리면 무슨 병이 생긴 것은 아닌지 의심부터 생기는 그런 나이다.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다던 김삼순. 걱정도 팔자다. 나이 먹어봐라. 너도 모르게 심장이 딱딱해져 있을 테니. 갑자기 심장이 심하게 뛰면 이상하다고 병원에 가야하는 시절이 기어코 오고야 말 테니. 그래서 내 몸을 가뿐히 실려 보낼 바람만 기다리는 마음까지 늙은이가 되고 말 테니.
홀씨
갈수 없네
그 아득한 거리 앞에
몸져눕는 나는
홀씨로 떨어져 죽어서야
그대 앞에 닿을까
갈수 없네
살아서는 그대 곁에
닿을 수 없는 나는
언제나 그대 쪽으로
바람이 불기만을 기다리는
한 포기 가녀린
들꽃이었네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87p
꽃이 피었다. 무성히. 이제 막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듯 무성히. <다시 사랑이 온다>의 표지 그림은 꽃잎 하나 떨어지지 않은, 온전한 벚꽃나무다. 이제 막 꽃망울을 틔워내어 봄을 맞이하는. 비바람에 떨어질지언정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온전한 모습으로. 바람을 기다리는 외로운 들꽃이 아니라 스스로 봄을 부르는 희망의 모습으로. 갈까 말까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풋내 나는 청춘 대신 먼저 꽃피워 봄을 데려오는 진짜 어른의 성숙한 사랑.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2년의 공백만큼 한껏 차오른 힘과 희망의 불씨를 나는 보았다.
봄을 맞는 자세2
봄이 와서 꽃 피는 게 아니다
꽃 피어서 봄이 오는 것이다
긴 겨울 찬바람 속
얼었다 녹았다 되풀이하면서도
기어이 새움이 트고 꽃 핀 것은
우물쭈물 눈치만 보고 있던
봄을 데려오기 위함이다.
골방에 처박혀 울음만 삼키고 있는 자여,
기다린다는 핑계로 문을 잠그지 마라
기별이 없으면 스스로 찾아 나서면 될 일,
멱살을 잡고서라도 끌고 와야 할 누군가가
대문 밖 저 너머에 있다
내가 먼저 꽃 피지 않으면
내가 먼저 문 열고 나서지 않으면
봄은 오지 않는다
끝끝내 추운 겨울이다
<다시 사랑이 온다> 71p
이제부터 단1초의 시간도 당신에게 주지 않을 거라며 탕탕탕 방아쇠를 당겼지만 역설적으로 이제부터 단1초도 주저하지 않고 매일 당신생각만 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듯 결심한 것처럼 들렸던 건 비단 나만 그랬을까. 여전히 확신 없이 가야만 하는 길에 대한 불안한 본심을 숨기더라도 꽃피우고 싶은 굳은 결심.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숙명임을 비로소 깨닫고 난후 오늘도 한 뼘 씩 자라난다. 길이 없는 허공에라도 길을 내어 이루어낼 사랑. 가는 길이 달라도 좋다. 사이에 사잇길이라도 있으면 그 길을 내어 가면 된다. 같은 공기를 마시고 숨을 쉬고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조금 멀지만 맞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의 차이는 딱 그 정도 일지도. 그래서 삶의 물결에 휩쓸려 그저 몸을 맡기면 안된다. 없던 길도 내어 가는 것이 진짜 어른이다. 진짜 사랑이다. 부모는 몸으로 이미 가르쳤지만 자식은 제 자식을 낳기 전에는 모르는 진짜 사랑. 홀씨가 되어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바람보다 먼저 헤쳐 나가야 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오는 것일까. 쥐어짜면 나오는 것이 용기가 아닐 텐데. 결국 사랑의 힘이다. 사랑하는 자체만으로.
바람 속을 걷는 법5
어디 내 생애 바람 불지 않는 적 있었더냐
날마다 크고 작은 바람이 불어왔고
그때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바람이 잠잠해지길 기다리곤 했다
기다리는 그 순간 때문에
내 삶은 더뎌졌고
그 더딤을 만회하기 위해
나는 늘 허덕거렸다
이제야 알겠다, 바람이 분다고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다리는 이에게 바람은 더 드세게
몰아닥칠 뿐이라는 것을
바람이 분다는 것은
헤쳐 나가라는 뜻이다
누가 나가떨어지든 간에
한 판 붙어보라는 뜻이다
살다보니 바람 아닌 게 없더라
내 걸어온 모든 길이 바람길이더라
< 다시 사랑이 온다> 136p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다. 그 나이에는 알 수 없던, 알아채지 못했던 사실. 살아 온 날보다 살아 갈 날들이 많았을 때는 몰랐던 사실 말이다. 항상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겨두었던 시절에는 쉽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흐르는 시간을 붙잡는 방법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다. 사랑도 삶도 그러하다. 늦게라도 와줘서 고맙다.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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