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동시에 처절하고 아름답다.

마치 서커스처럼……

 

벌써 작년이 되어 버렸다. 작년 12월 말, 이 책 <코끼리에게 물을>을 빠른 속도로 읽어버리고 그 당장엔 별 주절거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간략한 느낌이나마 적어놓자, 놓자...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몇 주를 책은 정물처럼 책상에 놓여져서 해를 넘기고 말았다. 시간은 그렇게 속절없이 가버리는곤 한다.

"나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13쪽)

올해 나이 아흔 아니면 아흔셋 둘 중 하나인 노인 제이콥의 이야기이다. 제이콥은 현재 요양원에서 지내는데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밥을 먹을 수도, 씻을 수도 없다. 나 역시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건만 어느 순간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려 보면 제이콥과 같은 노인과 같은 방, 옆 침대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밥을 얻어먹고 있을 것만 같다. 이런 제이콥이 자신의 나이 스물셋이었던 때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제이콥의 정신이 어느 정도 온전한지는 잘 모르겠지만-아니 온전하지 않을수록 소설의 재미는 더해지는지도-이야기를 ’펼쳐 놓는다’라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사건·사고가 많은 주된 서커스단 시절의 이야기는 한 편의 쇼를 보는 듯,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굴곡이 있고 박진감 넘치게 철커덕거리며 지나간다. 

자~ 남은 시간 558초(책 분량) 오늘 가면 다시 오는 쇼가 아니여~.

제이콥이 스물셋이었던 때는 미국이 대공황으로 은행이 문을 닫고, 사람들은 진료비를 낼 돈이 없어서 대신 콩과 달걀을 내고 치료를 받을 정도로 혼란하고 궁핍한 시절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지난 1990년대 중·후반, 아버지들이 일자리를 잃고 자식들은 비정규직이나 그나마도 일자리도 없이 제자리를 빙빙 돌던 때와 비슷하다. 지금도 연장선상이긴 하지만 생소한 IMF 외환위기를 갑자기 당하고, 그런 사태를 만든 당사자가 아니어서 더욱이 세상물정 모르고 대학교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던 한 청년이 학장의 부름을 받고 부모님 두 분이 졸지에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제이콥이 서커스단의 기차를 잡아탄 것은 마침 구원의 손길이었는지 모른다. <벤지니 형제 지상 최대의 서커스단>의 기차는 다름 아닌 제이콥의 인생에서 청춘 열차 칸의 다른 이름인 것 같기도 하다. 단지 시대상황이 더해져서 더욱 처절하고 아름다웠던 그때 그 시절.

제이콥이 부모님을 잃고 <벤지니 형제 지상 최대의 서커스단> 기차를 탔던 것처럼, 거대한 코끼리 로지도 비록 제 발로 들어오진 않았지만 엉클 앨이 망해버린 서커스단에서 최고인 줄 알고 사들여 <벤지니 형제 지상 최대의 서커스단>의 가족이 된 것이다. 사실은 <벤지니 형제 지상 최대의 서커스단>도 글자 그대로 ’지상 최대’는 아니고, 당시 대공황의 여파로 무너져가는 서커스단의 시체를 먹고 소생해가는 얍삽한 서커스단이었다.

"엉클 앨(서커스단장)은 한 마리 배고픈 하이에나, 시체를 노리는 독수리다." (133쪽)  

그러니까 제이콥이나 거대한 코끼리 로지, <벤지니 형제 지상 최대의 서커스단>은 모두 ’물’이 필요한 존재라는 말이다. 물이 없으면 생명이 잉태되지도 않지만 유지될 수도 없다. 제 이익에 눈이 먼 엉클 앨이 구입한 몸집이 큰 코끼리가 쉽게 조련이 되지 않는 상황은 잘 생각해 보면 우습기 짝이 없고, 그 외에도 문장이 짧고 영상에 어울리는 문체여서 빨리 읽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스운 장면이 참 많다. 

"이 모든 게 다 눈속임이야, 제이콥. 그리고 그건 나쁜 게 아니야. 사람들이 우리한테 원하는 게 바로 그거니까. 사람들은 우리한테 눈속임을 원해. 그게 눈속임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고." (178쪽) 

책을 읽은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읽을 땐 그토록 생생하고 지저분하며 황홀하고 끔찍하면서도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서커스단의 이야기가 벌써 가물가물하다. 한참 끓는 청춘의 시기를 보내고 있거나 청춘의 시기를 회상하면 마냥 기분이 좋아지는 분, 요양원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시는 분, 요양원에 부모님을 맡겨놓으신 분, 순식간에 지나가버릴 쇼(인생)를 맛보고 싶으신 분께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