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비디오 가게를 하는 한 남자(장현성)가 있습니다. 둘보다 혼자가 익숙하고, 거창한 목표 같은 것에 관심 없이 편안하게 시간 속에 파묻혀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어찌 보면 무기력할 정도의 삶을 살아가는 남자군요.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살고 싶었는지, 아니면 세상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이 세상의 일원이 되는 것처럼 그는 영화가 시작할 때 이미 각종 비디오에 둘러싸여 있었거든요.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비디오는 하나의 세상입니다. 그것도 아주 전형적(다시 말해 일상적)인 세상이죠. 비디오에는 다양한 주인공들의 다양한 삶과 세상을 담고 있지만 결국에는 장르와 보편적 영화 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중적이고 전형적인 비디오에 파묻혀있는 남자의 일상에 어느 날 두 개의 돌덩이가 날아 들어옵니다. 하나는 알 수 없는 인물에게서 전달된 편지에요. 그 편지엔 비디오 남자가 자신의 삶에 일종의 활력소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뜻하지 않게 전달된 비디오테이프구요. 그 테이프엔 한 여자의 사생활이, 그것도 중요한 추억이 들어있습니다. 이 편지와 테이프로 인해 남자의 삶은 인간적인 활력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일상이란 것이 그리 쉽게 깨질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남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첫 정사는 운명이고 그 다음부터는...'' 그 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계속 했다면 아마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 다음부터는 일상이다.''

고인 물에 던진 돌은 물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돌의 크기와 던져진 힘에 따라 출렁거림의 강도와 시간도 다르죠.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물은 다시 잔잔해지고 돌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당연히 돌은 물 속에 있겠지만 말이에요.

남자의 삶도 마찬가지에요. 비디오테이프와 편지로 인해 거칠게 요동쳤던 그의 삶도 결국에는 모두 추억으로 남긴 채 다시 일상에 파묻혀 버리고 말테니까요.

무기력하고 허탈하다고요? 그런데 그게 보통 사람들의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끔씩 일렁이는 파문에 행복해하거나 힘겨워하다가도 일상을 거부하지 못한 채 거기에 파묻혀 버리는 우리들의 삶 말이죠.

1000원을 줘도 700원을 거슬러주고 300원만 받아가겠다는 걸인 아저씨의 고집스러움. 사람의 일상 역시 그 같은 고집스러움을 간직한 듯 합니다. 아니, 어쩌면 고집스러운 것은 일상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사람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