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듣는다 / 정재분

처마 끝에 매달린 소리 없는 풍경에게 긴긴 밤이 다녀

가고 언 햇살이 스며들어 실핏줄이 자랄 즈음 묵묵한 어

느 손길 윗목 구들장 내어줄 제 담요를 뒤집어쓰고 기운

이 차올라 하얀 꽃을 피우는 겁니다 고드름이 낙화하는

정월보름 햇나물이 군내를 헹굴 즈음 항아리 하나 가득

바다를 길어 올리는 겁니다 검댕이 숯과 붉은 고추부지

깽이로 불씨를 일으키고 훠월훨 사르며 시간 마루를 넘

어서

다른 이름으로 태어나지요

(page59-메주-전문)

날씨가 아주 덥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시집의 속지에 2010년 정월이라고 시인은 서명을 해주셨네요. 지난겨울 시집을 받고 받은 참에 읽었던 후로 이즈음 정재분 시인의 시집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습니다. 어느 행사에서 잠시 뵈었을 때 위의 시 ‘메주’가 기억에 남는다는 제 말에 대한 시인의 반응이 좀 모호했던 때문인지 아님 시집을 읽으면서 이 시 ‘메주’가 유달리 깊이 각인되었던 것인지 여전히 ‘다른 이름으로 태어나지요’라는 마지막 구절과 함께 제 기억에 잠기어 있어서 말이지요.

저는 이 시 ‘메주’를 읽으면서 참 편안하게 다가오는 시어들과의 만남을 기뻐했습니다. ‘평이하게 하지만 확실히 다른’ 표현들이 이제 ‘다른 이름으로 태어나’ 장차 우리의 밥상에 올라오는 맛만큼이나 담백했습니다. 시의 담백함을 음미하면서 저는 또 내 시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언어들 그 언어들 속에 내가 가져다 시로 엮어내는 몇 몇의 언어들이 과연 이 시 속의 메주처럼 잘 마르고 삭아서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나고 있는 것인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어쩌다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과연 다른 것들과 구분되는 맛과 향을 가지고 있는지, 또 빼어난 맛과 향을 만들기 위해 나는 얼마나 성심을 다 하고 있는지......이런 저런 생각이 참 많이 해 본 시였습니다.

우연은 사절한다고 쓰여 있다/ 안이 보이지 않는 유리창으로 내다본다 한들/ 인기척마저 지울 수는 없다/ 분노를 좀 더 다듬을 일이다/ 자중을 위해 한 겹/ 상처를 위해 한 겹/ 부디 중독된 몰골을 신회하지 말기를/ 처음부터 물꼬는 터져있다/ 애초에 결과는 목록에 없다//

(page15 모음을 찾아서 일부)

시집 [그대를 듣는다]에 실린 정재분 시인의 시들은 알이 꽉 찬 육 쪽 마늘처럼 또랑또랑하고 단단합니다. 잘 골라서 사용했음이 분명한 시어들이 그렇고 여러 분야의 여러 방향을 가리키는 시의 소제가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야 시인의 일상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만, 왠지 늘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일 거라는 느낌이 좋습니다.

글쟁이는 글로 말하고 시인은 시로 말 한다고 했던가요? 시를 쓰고 남의 시를 읽으면서 새록새록 다가오는 것은 누가 쓰든 무엇을 쓰던 결국은 글쓴이가 아는 만큼만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배어 나오는 언어들에 대한 책임이 새삼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러니 나도 또한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최근 우리 시단에서 다시 ‘흘러넘침’의 시들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욕망의 유로‘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일군의 경향들이다.(중략)

정재분 시집의 시들 역시 최근의 시적 경향들과 같이 ‘욕망의 유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의 시들은 흘러넘침을 거침없이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흘러넘치지 못 하는 욕망의 막힘과 좌절에 초점이 가있다. 그 막힘과 좌절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욕망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다시 본다.(page129-130 황정산의 해설 중)

최근 우리 시단의 주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아는 척을 하기엔 저는 너무 많이 여립니다. 물론, 아는 것도 별로 없습니다만. 우리 시단의 주조가 ‘흘러넘침’의 시들이라는 황정산의  해설에 고개를 갸웃거려봅니다. 여러 의미의 ‘흘러넘침’이 과연 이 시집의 시들에 부합하는 가를 짚어보느라 또 한참을 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 시각에서 보아 이 시집의 시들은 ‘흘러넘침’보다는 절제와 억누름의 시가 더 많았다고 한다면 눈을 흘길 이가 있을 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절제와 억누름이 이 시집의 분위기를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만들어주고 있다고 봅니다. 전체적으로 이 시집의 시들은 매우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이 또한 시인이 늘 노력하는 모습의 발로라고 여겨집니다. 다음에 만나게 될 시인의 또 다른 모습이 기다려집니다.

좋은 시공부가 되었던 시집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저도 늘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게으름을 펴는 사이 나도 모르게 녹슬어 생각의 날이 무뎌지면 안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