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굶은 별들이 뒤란에 내려앉고 / 김수지

시는 물론 잡다한 다른 글조차 써지지 않는 날들을 살고 있다. 삭은 고무줄처럼 축 늘어져서는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무기력한 일상들. 그 일상들을 마치 남의 일인양 물끄러미 바라보다 혼자 폭-하고 한숨을 쉬기도 한다.

나는 아직도 되고 싶은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목표와 현실 사이의 이 깊은 크레바스에 발을 헛디딜 때마다 떨어져 내리지 않으려 심하게 몸을 흔들며 중심잡기를 하는 것일까. 마음이 쑥대밭처럼 분분할 때는 개념정리가 확실한 책들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벌써 며칠을 계몽사에서 나온 과목별 학습백과 사전에 코를 빠트리고 지낸다. 정말로 새삼스러운 것이 초. 중등용으로 나온 이 사전을 읽으며 아하, 하고 나도 모르게 내 머릿속의 흐트러진 부분들을 다시 정돈하곤 한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들이건만 내가 알고 있거나 능숙하다고 믿었던 부분들이 사실은 살면서 이루어진 편견으로 지어진 사상누각이었음을 깨닫게 될 때마다 그 쓸 데 없는 잘난 척이 부끄러워지면서 좀 더 겸손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한층 더 몸을 웅크리게 된다. 20권으로 이루어진 책이니 언제나 다 읽으려는지 날짜를 가늠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한동안은 백과사전이 가지고 있는 단정한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시를 쓰면서 다른 시인의 시를 읽는 것은 아무리 많이 읽어도 절대로 넘칠 일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 남의 시를 많이 읽으면 본인도 모르게 남의 시를 닮을 수 있어서 시집을 잘 읽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일련의 시인들의 잡담을 들은 적이 있다. 정말 그런 걸까? 시 쓰는 사람이 시를 읽지 않는다면 음악 하는 사람이 음악을 듣지 않는 것이나 미술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미술 작품을 감상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라는 걱정이 생긴다. 불경에 돌아보면 세상 만물이 다 선생이라는 말이 있다. 잘 된 것은 잘 된 대로 안 된 것은 안 된 대로 이해하고 분석하고 내 것으로 만들고 배우려는 자세를 알려주는 말일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되는 행위이므로 결국 발전의 조건 중엔 ‘겸손’이 중요한 덕목이라는 소리로 나는 알아들었다. 다시 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많이 읽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의 시를 닮았을 정도가 되도록만 시집을 읽을 수 있다면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이미 나름대로 녹이고 두드려서 더 단단하고 빛나는 쇠붙이를 만들어내고도 남았을 텐데.

나는 다른 사람의 시를 읽을 때 잘 쓴 시 잘 못 쓴 시를 구분하지 않는다. 일단, 내가 그런 구분을 지을 만큼 안목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 어쨌거나 심혈을 기울인 작품을 ‘잘’과 ‘못’으로 맘대로 나누는 것은 자칫 사람까지도 나눌 수 있는 문제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 이렇게도 쓰는 구나’라는 마음으로 시를 읽는다. 같은 사물을 대하는 다른 시선을 만난다는 것은 늘 신선한 놀라움 자체이지 않을까.

어쨌든 아직껏 내가 써놓은 시들을 가끔 헤집어 보면 나이를 먹으며 나도 모르게 주름살이 늘고 몸의 살비듬도 늘었듯 시 또한 함께 나이 먹어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젊은 날의 신선하고 도발적인 시각보다는 한결 수그러들고 세상에 순응한 글귀와 시어들을 만나면서 앞으로 더 나이 먹은 내 시는 또 어떤 모습으로 달라질까 궁금해진다.

김지수 시인의 시집 ‘저녁 굶은 별들이 뒤란에 내려앉고’를 읽으며 아주 조금이나마 내 시의 나이 든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면 김 시인께 실례가 안 될 런지 모르겠다. 아쉽게도 나는 김 시인과 인사를 나눠본 적도 없어 문인협회 행사에 같이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분인지 조차 모르고 돌아오곤 했으니까. 그래서 이 시집을 읽으며 다만 나보다 조금 더 연배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잘 느끼지 못 하고 지나가지만 연령대별로 같은 사물을 표현하는 언어의 색깔이 다 다르다. 40대엔 40대만의 색깔이 그리고 50대는 50대만의 색을 언어가 담고 있다. 간혹 나이보다 젊게 시를 쓴다는 시인들의 시도 세세히 살펴보면 깊숙이 숨겨놓은 세월의 흔적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마치 목주름처럼. 김 시인의 시들을 읽으며 시의 갈피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세월의 향기를 맡는다. 아주 오래전 우리 엄마한테서 나던 분향처럼 향긋하면서 아릿한.

몸값 비싸게/ 나날이 독식을 꾀하고 있다/ 각진 숲의 꼭지들/ 벼린 날을 세워 둥근 하늘을 파먹고 있다/ 번식력은 또 얼마나 왕성하던지/ 한겨울에도 우후죽순 자라는/ 빌딩들, 바람의 길도 막아/ 더 이상 흔들림 없는,/ 입 다문 벽창호들의 군락지//

하늘은 가끔/ 기하학적 문양을 하고 지상을 내려다본다/ 잘려나간 어깨, 일그러진 얼굴이/ 아프지 않느냐고//

골목 안 어디쯤에서 잔기침소리 들린다/ 한쪽 가슴을 도려낸 뭉그러진 그늘/ 모로 눕는다//

-[서울 종로 전문]

이 시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다. 이 시집엔 유달리 색깔이 진한 언어들이 많이 쓰였다. 시를 읽는 사람이 아니어도 일상에서 고정관념화 되어버린 이미지들이 너무 강해서

시 속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나이 먹음’은 성숙의 완성을 넘어서 단단하게 영글어 감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늙음’은 왠지 물기가 말라가고 삭아가며 바스라질 것 같은 이미지가 먼저 떠올라 서글프다. 이 느낌은 시어에도 적용되어 시가 나이 들어감을 거부할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내 시가 늙는 것은 싫다. 이야기가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지만 늙지 않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무수히 많은 다른 시인들의 시집을 아주 심각하게 읽는다. 아, 이렇게도 쓰는 구나 혼자서 무릎을 쳐가면서. 이 시집을 읽는 내내 앞으로 시어를 어찌 공부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했으니 귀한 시집과의 만남을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