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가는 길

뒤가 묵직하여 간이 화장실로 들어가 시원하게 근심을 덜어 냈다. 근심을 덜어 낼 때마다 느끼는 건 역시 사람 몸뚱이는 채울 때보다 비울 때가 더 상쾌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 마음인들 채우는 것이 더 좋기만 하겠는가. 마음이 욕심으로 마비가 되기 전에 비우기를 실천하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page90)

아들아, 

마음을 비운다는 건 어떤 것일까? 세상의 모든 물질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 그리고 혹시나 상대방에게 기대했던 내 마음들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아닐까? 상대방에게 바라는 그 무엇인가가 사랑일 수도 있고 또는 관심일 수도 있을 테지. 부모 된 입장에서야 더군다나 고3 자녀를 둔 학부모라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길 바라는 것이 이 나라 모든 학부모들의 마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나도 물론 네가 고3일 때 무던히도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길 기원했었단다. 고3 부모의 짐을 벗어 놓은 지 얼마 안 되어서일까 ‘해남 가는 길’이라는 제목보다는 ‘고3 아들과 쉰 살 아버지가 함께한 9일간의 도보여행’이라는 설명이 먼저 내 눈에 쏙 들어왔구나.

고3을 목전에 둔 어느 아침 아들은 ‘아빠랑 둘이 국토순례를 떠나고 싶어.“라고 말 한단다. "순간 아버지는 정신이 사납도록 마른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아들 녀석이 국토순례의 파트너로 아버지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가슴 뿌듯할 수가 없었다."(page 10-11)고 말하고 있다. 그런 상황이 내게 있었다면 나도 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가슴 뿌듯했을 것 같구나. 

아들과 아버지는 사이좋게 국토순례를 떠나고 해남까지의 여정을 잘 마무리 한단다. 길을 떠난 여행기는 이미 너무 많이 읽었잖니. 그래서일까 이 책의 내용들은 어찌 보면 그냥 좀 밋밋하단다.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담백’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구나. 

책은 주로 아버지의 목소리로 되어 있지. 아들의 목소리는 [아버지와 함께한 국토순례]라는 제목으로 책의 뒷부분에 몇 페이지가 실려 있단다. 우선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된 여행기를 읽고 그 다음 만나는 아들의 목소리를 읽으면서 사실은 엄마는 더 많은 생각을 했단다. 

책에서만 봐도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간 두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상황에 대한 다른 시선을 이야기 하고 있더구나. 무거운 가방을 메고 종일 걷느라 물집이 잡힌 아들에게 약을 발라주면서 아버지는 무거우면 바꿔서 메자고 하지 그랬느냐고 했지만, 아들의 이야기는 아니었어. 앞에서 휘청휘청 걸어가는 아버지에게 도저히 무거운 가방을 바꿔 메자고 할 수 없었더란다. 우리가 아니, 부모가 알고 있는 자식들의 모습은 늘 아기 같고 부족하기만 한데 말이지 너희들 마음속엔 이렇게 깊고도 알찬 어른의 마음이 들어있더란 말이니. 

이 엄마의 눈에도 우리 아들은 늘 강아지일 뿐이지. 그렇지만 엄마가 볼 수 없는 어른의 모습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어. 여전히 너는 부족한 거 같고 엄마의 보호가 필요할 것 같은데 사실은 잘 살고 있는 사람은 너고 쓸 데 없는 걱정에 매일 매일의 행복을 근심과 바꾸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은 엄마일 런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깨달았단다. 

 이제 대학생이 되었고 집을 떠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씩씩하게 잘 지내는 너를 믿어도 된다는 확신. 이 책의 앞부분 아버지의 글보다 뒷부분 아들의 글을 읽고 나서 가지게 되었어.

 입학식을 하고 네 짐들을 기숙사에 넣어주고 오면서 아빠한테 구박받을까봐 눈물을 참고 왔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학기가 지나가 다음 주면 집에 온다지? 우리 아들 참 장하다.

우리도 언제 해남 가는 길의 아버지와 아들처럼 국토순례 한 번 떠나가 보는 거 어떨까? 물론, 우린 엄마와 아빠와 아들 세 식구가 되겠네. 뭔가 계획을 세워본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이야. 즐거운 여름 방학 계획 많이많이 세우길 바란다. 

아, 그리고 이 책도 읽어보길 바란다. 너도 엄마처럼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