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 수강과목에  [동서양 고전]이라는 과목이 있다. 교양과목이긴 하지만 3학년쯤 되면 교양도 거의 전공수준이라 그리 만만치 않다. 이번 중간고사 과제물은 과제로 주어진 고전들 중 한 권을 읽고 교수님께서 내주신 숙제대로 레포트를 작성하는 것이다.  목록을 보니 모두 쉽지 않은 책들이다. 읽는데만도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될 것같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나는 시간이 별로 없다.
아이들 중간고사 준비도 해야하고 이번엔 공부방까지 옮기느라 심적으로 너무 고단한 때와 겹쳐서 고민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더군다나 목록에서 일리아스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이 책으로 과제물을 정해버렸다. 

호메로스의 [일이라스]와 [오잇세이]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라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것같다. 그렇지만 고전이라 이름붙혀진 것들이 가지는 취약점은 너무 잘 알려져서 의외로 또 잘 모른다는 것이 아닐까? 나 역시도 이런저런 다이제스트본들은 이미 여러번 읽었지만 원전에 대한 번역본은 미처 생각해보질 못 했었다.  요약본이 아닌 원전에 대한 번역본을 읽을 수 있다는 것. 내가 다른 무게있고 깊이있는 책들 중에서도 선뜻 일리아스를  선택한 이유이다.

도서출판 숲에서 나온 이 책은 본문만 680페이지가 넘는다. 부피만으로도 묵직하다. 그러니 전부를 읽는데 많은 시간이 투자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길고 복잡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아주 재미있게 책 속에 빠져서 시간을 보냈다. 이미 아는 이야기라서 그런거라고? 글쎄, 그보다는 이 작품이 서사시라는 것에 좀 더 주목한다면 그리고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읽는 내내 내가 시를 낭송하는 듯 또는 시를 낭송하는 낭송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살아있는 운율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과제물에서 원하는 것은 책 속에서 스스로 정한 부분의 내용에 대한 요약과 감상이다. 물론 써야하는 양도 정해져 있다. 하지만, 나는 그 규칙에 따를 수 없었다. 시라는 특성상 중요 대목만 발췌를 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필사를 하면서 가졌던 느낌들을 요점만 발췌하면서 반감시키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점수가 깎일 위험을 감수해가면서 한 대목을 모두 다 필사를 했다. 바로 일리아스의 6권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만남]이다.  

이 책은 일리아스라는 도시의 트로이아인들과 아카이오이족으로 널리 불리던 그리스군들의 전투이야기이므로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전투는 모두 나흘간만 벌어진 것으로 되어있지만 전투의 장면들이 아주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문득 ’300’이라는 영화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영화의 힘을 빌어 일리아스의 장면이 실감나게 다가왔다기 보다는 일리아스를 읽으며 상상되어지는 장면들을 따라가다보니 영화를 만났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같다. 
하지만, 전투장면 일색의 이 서사시에서 살짝 비껴 앉은 것처럼 6장의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만남 부분은 다른 장들보다 인간의 내면의 고뇌와 슬픔이 아주 진하게 표현되어 있다.

나는 일리아스의 승자인 아킬레스보다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헥토르에게 더 마음이 간다. 그가 보여주는 면들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고 어쩌면 헥토르야말로 전인적인 인간의 감정과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갖춘 인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헥토르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헤바카의 아들이다.  일이아스에 등장하는 헥토르는 잘생기고 용감하며 트로이아를 정말로 아끼고 사랑하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리스군의 아킬레스가 아가멤논과 다툰 뒤 전투에서 물러난다. 그 때 헥토르는 그리스군을 트로이아의 성벽에서 멀리까지 쫓아낼 수 있었고 헥토르는 아폴론의 도움으로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대신 싸우러 나간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죽인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위해 전쟁에 다시 참여한다. 아킬레우스를 두려워한 헥토르는 모든 병사들이 성안으로 도망침에도 불구하고 아킬레우스와 싸우려하지만 결국 죽임을 당한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전차에 매달아 며칠 동안이나 트로이아 성벽을 돌며 끌고 다닌다. 프리아모스 왕이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아들의 시체를 돌려줄 것을 간청하자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 왕의 간청을 들어주어 헥토르의 시체를 돌려준다. 헥토르의 시체를 트로이아 사람들이 장사지내며 일리아스의 이야기도 막을 내리게 된다.

제6장에서는 그리스군과의 전투에서 아드라스토스가 메넬라오스에게 잡혀 죽임을 당한다. 이에 트로이아군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헬레노스가 헥토르에게 성안으로 돌아가 성안의 여자들에게 아테네여신의 신전에가서 제물을 바치고 기도하게 할 것을 권한다. 헬레노스의 말대로 성안으로 돌아온 헥토르는 그의 어머니를 만나 헬레노스의 말대로 아테네 신전에 기도할 것을 명하고  이 전쟁의 원인이 된 파리스의 집으로 달려가 파리스가 전장에 참여할 것을 종용한다. 파리스의 아름다운 아내 헬레네의 상냥한 말에도 퉁명스러웠던 헥토르는 다시 아내와 아들을 보기 위해 집으로 달려간다. 헥토르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안드로마케의 만남은 정말로 가슴이 아픈 대목이다. 살아 돌아오지 못 할 것이 뻔한 전장으로 남편을 보내야 하는 아내의 슬픔과 두려움이 절절하다. 헥토르는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안고는 제우스신에게 아들을 위한 기도를 한다.  헥토르의 기도는 잠시 전쟁터에서의 장수의 자리를 떠난 평범한 아비의 모습 그대로다. 아들의 장래가 아비의 장래보다 밝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축원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성을 잃지않고 겁먹지 않은 침착한 모습을 아내에게 보여준다. 
이런 핵토르의 모습이 일리아스를 읽는 내내 용감무쌍했던 아킬레우스의 활약보다 훨씬 더 인상깊게 남겨진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어떤 부분보다 6장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였던 그 느낌은 필사를 하면서도 여전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신화의 주인공들을 물론 신이어야 한다. 하지만, 일리아스를 읽으며 나는 그 속에 등장하는 신들이 싫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예전에도 좋아했던 적도 없지만,  그들의 변덕과 비이성적인 행동들이 부아가 난다. 신들은 그들이 가진 능력에 비한다면 얼마나 가볍고 유치한가. 그런 신들의 놀잇감처럼 부침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매 순간 삶에 충실했던 신화속의 많은 보통의 인간들한테 나는 더 많은 경의와 박수를 보낸다. 신들이 인간을 농락하듯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인간사가 그리 만만치 않은 고해임을 알려주기도 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속에서도 삶에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모습은 또 다른 힘이 존재함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화가 가지고 있는 수 많은 알레고리들은 잠시 접어두고 지금 그렇게 많았던 신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그저 이야기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변덕스러웠기 때문에 스스로 권위와 고귀함과 인간의 경배를 집어던졌다는 소리가 아닐까? 그리하여 두껍고 어려운 이야기 속으로 영원히 유배를 당한 것은 아닐까?
나는 헥토르와 같은 인간의 도래를 기대해본다. 책임감과 애국심으로 뭉쳤던 리더.  하지만, 진심으로 아내를 걱정하고 자식을 염려하는 보통의 따듯한 마음도 가진 사람의 모습을 헥토르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잠시 남편이 전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만류하기도 했던 아내 안드로마케가 가엾은 생각이 들었던 헥토르는 이런 말을 한다.
"어느 누구도 내 운명을 거슬러 나를 하데스에게 보내지 못할 것이오. 하지만 운명은 겁쟁이든 용감한 사람이든 일단 태어난 이상은인간들 가운데 아무도 피하지 못했소."
헥토르도 운명을 피하지 못했고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스도 마찬가지로 운명을 피하지 못 했으며, 그들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던 신들도 신들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 했다. 그러니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내가 아무리 공부해도 다 알 수 없을 더 많은 의미를 숨기고 있을 것이 분명한 이 거대한 서사시를 읽으며 내가 건져낸 조그만 실 한 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