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걸인 사무엘.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무척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늘 곁에 끼고 살다시피 했던 아들 녀석을 멀리 떼어놓은 엄마로서의 걱정스러움과 적적한 집안에 대한 알 수 없는 거부감. 그리고 내 일상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일에서의 위기감 때문에 몹시도 버거운 시간들이었다. 십년이 넘도록 공들여서 가꾸고 키워 온 나의 일터. 지난 IMF 때도 외풍에 관계없이 순항하던 이 일이 이즈음 불어 닥친 경제 한파 앞에서 휘청거리는 거 같아서 자꾸 마음이 조급해졌던 거 같다. 거기다가

어떤 문제에 부닥쳤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 밖에 없으니 그러므로 나 자신을 가장 믿어야 한다는 내 평소의 소신이 흔들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문제 해결의 정면 돌파엔 이성이 감정이나 종교보다 우선한다는 내 생각은 의외로 힘든 시간들을 함께 나눌만한 친구가 없는 심심한 사람으로 나를 묶어놓았었다는 것도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나답지 않게 평상심을 잃었다고나 할까.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지혜에 관한 우화’라는 부제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연금술사’와 ‘어린왕자’를 떠올리고 있는 나를 보면서 나의 독서 안목이 여전히 독창적이지 못 하고 그저 평이한 수준일 뿐 이라는 생각에 잠시 실망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언급한 두 책이 평이하다는 소린 절대로 아니다. 물론 이 책 ‘행복한 걸인 사무엘’이 두 책의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다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잠시 위안이 되는 책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이 책의 모습을 책 속 한 구절로 옮긴다면 바로 이렇게 묘사할 수 있겠다.

“사서는 놀라울 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고 사람을 쓰는 묘한 힘이 있었다. 작은 체구에 걸맞지 않게 에너지로 가득한 여자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근사한 눈을 갖고 있었다. 환상적일 정도로 깊고, 지혜로 반짝이는 눈을! 순간적으로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그런 눈을 말이다.”(page34)

오래간만에 토스트기계를 꺼내서 식빵을 굽고 얼마 전 만들어놓았던 대추잼을 발랐다. 진하게 그리고 양도 한껏 많게 커피를 타고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서 책을 펼치던 오후. 그나마 책을 읽으며 잠시 마음의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만나보고 싶었거나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말들이 책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에.

카르페디엠 (오늘 하루를 살아라, 또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은 호라티우스가 한 말이라고 한다. 정말로 매력 있는 말이다. 또한 이 책에서 말 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생각을 단 한마디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먼저 삶에게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한, 절대로 삶은 우리에게 먼저 시간을 내주지 않아요.(page32)

맞다. 그러고 보니 나도 사무엘만큼이나 아니, 장-자끄 만큼이나 그동안은 건조하게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매일이 사막인 아니, 나 스스로가 사막 여행자 같은 삶. 그런 삶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몹시도 쓸쓸해졌다. 나는 먼저 삶에게 시간을 할애한 적이 있었을까? 나야말로 내 시간을 부둥켜안고 버둥거리면서 삶이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고 내내 툴툴거린 건 아닌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또 그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다가오는 일들을 받아들이고, 그 일들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뿐이야.”(page87)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고치는 데 있지, 부정하는데 있는 건 아니거든!"(page205)

책을 읽다가 서둘러 수첩을 꺼내서 불현듯 떠오르는 이번 학기 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을 스케치 해 본다. 잠시의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보다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시도한다는 것은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달라지게 하는 힘이 있다.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지만 그 일들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볼만한 가치를 발견한다는 것은 기쁜 일임에 틀림없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나를 발견한다. 하지만,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기만 하는 것 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시원한 시선이 반갑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고 한다. 물론, 책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부족한 부분은 부족한 대로 현명한 독자들은 스스로 채워가며 읽을 줄도 알 것이고 더러는 부족함을 미처 느끼지 못한 채 자기의 그릇만큼 저자의 생각을 받아가는 독자들도 있겠지. 나는 어느 쪽의 독자인지 모르겠다. 책을 읽는 내내 열심히 밑줄을 긋고 되돌려 읽기를 했다면 우겨서라도 스스로 채워가며 읽을 줄 아는 독자라고 말 하고 싶다면 혼 나려나?

모두 좋았는데 마지막 단락인 [폭로]부분이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확~풀려버린 휴지처럼 풀어져버리는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진행된 이야기들의 완성도를 돌아 보건데 아무래도 [폭로]부분은 작가의 팬 서비스 부분이 좀 지나치지 않았나싶다. 하긴, [폭로]부분이 생략되어도 좋으려면 이야기가 좀 더 세심해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말로 꼼꼼하게 밑줄을 긋게 만드는 이야기와 더불어 본문의 일러스트들이 너무 너무 맘에 들었던 책이기도 하다. 한 번쯤은 꼭 따라 그려보고 싶어지는 그림들 덕분에 두 사람의 걸인 사무엘과 장-자끄 그리고 그들이 나눈 이야기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함께 들어있는 파랑색의 수첩은 책을 읽기 전엔 단순히 색깔이 예쁜 파랑색의 무지 수첩이었지만 책을 모두 읽고 난 후 다시 들춰보는 이 수첩은 이제 무한한 이야기가 숨어있는 한 권의 책이 되어 내게 다가온다. 책장을 가만히 들춰봐야겠다. 거기 혹시 내 이름이 적혀 있을 런지도 모르니까. 357번 배선옥에게 7번 엘리자벳 페르씬느가 라고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