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은 어디로 갔나 / 서영은

 

 

사랑하는 당신!

이제야말로 나는, ‘나를 사랑한 당신, 당신을 사랑한 나’라는 삼생(三生)을 이어온 관계가 어마어마한 축복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의 무명을 깨우쳐주기 위해 평생 수고한 당신의 그 애끓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후생에서 우리 만나게 되면 확인하게 될 거예요. 전생의 빛 때문이라면, 이제 그만 나의 이 회한과 참회의 눈물을 핏빛 진달래처럼 즈려밟고 편히 가세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말이 마지막임을 맹세합니다.”(page 284)

 

지금 내 눈길이 머무는 곳은 내 책상 맞은편 한쪽 벽을 빼곡하게 채운 책꽂이다. 공간이 부족해 안쪽과 바깥쪽 두 줄로 책이 꽂힌 책꽂이 안쪽의 어딘가에 1983년도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꽂혀 있을 터 그리 먼 옛날도 아니건만 아주 먼 역사의 유물을 발굴해내 듯 책의 위치를 가늠해 본다. 1983년은 작가 서영은이 ‘먼그대’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던 해이다. 흑백 사진 속에 오롯이 담겨있던 서영은의 모습은 아무리 새로운 기억을 떠올려보아도 그다지 예쁜 모습은 아니었다. 간장이 가득 담긴 항아리 같은 아니, 손을 집어넣어 속을 헤집어 볼 수 없는 목 긴 물병 같은 모습 그리고 짧은 컷트 머리 뒤로 오히려 더 선명하던 안개의 이미지. 그녀가 김동리의 아내가 되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그 뒤 몇몇의 소문을 끌고서 물속으로 가라앉듯 잊혀졌다. 중간에 ‘사막을 건너는 법’을 발표했었지만 ‘먼그대’에서 느꼈던 그 애틋한 물기를 가을볕에 잘 말린 고추처럼 날려버리고 바스라질 듯 서걱거리던 문체가 영 맘에 안 들어와 책을 덮었던 기억까지. 그럼에도 돌이켜 보니 나는 무척이나 오랫동안 작가 서영은의 팬이었다.

 

작가의 자전소설인 ‘꽃들은 어디로 갔나’는 참 담담해서 더 애틋하다. 굳이 작가의 자전소설임을 염두에 두고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긴 세월의 물살에 잘 씻기고 다듬어진 무엇인가를 보는 듯 말끔한 소설 속으로 나도 모르게 걸어 들어가게 된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현란한 문장도 없고 감성을 두드리는 멋들어진 표현도 없이 그저 담담한 이 소설이 읽는 이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행간에 담긴 세월과 그 세월을 잘 갈무리 한 작가의 진정한 마음이 우러나기 때문은 아닐까.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비로소 김동리의 소설들을 그 소설 속에 느껴지던 힘의 원천에 대해 이해했다. 무엇보다도 젊은 한 때 멋들어지게만 읽었던 서영은의 ‘먼그대’를 제대로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건너뛰어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자리에 그녀를 되돌려 놓게 되었다.

 

“사랑은 목숨 같은 거야. 목숨을 지키려면 의지를 가져야해. 그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고 생각하지 말고, 니 목숨을 지킨다고 생각해라.”(page68)

 

젊은 아내 호순과 서른 살 나이 차가 나는 박 선생 그리고 박 선생의 아내인 방 선생. 그들의 사랑은 소설 속에서 또 현실 속에서 참 진진하고 눈물겹다. 왜냐하면 어떤 형식으로 그들이 사랑을 표현하고 사랑을 위해 행동했든 그들에게 사랑은 목숨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