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 발걸음이 닿아야 할 곳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는 순간이 있다. 언제부턴가 문득문득 찾아와 나를 괴롭히던 떠나고자 하는 욕망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소위 인생이 참 쓰다라는 걸 실감하는 나이가 되면서 부터는 좀처럼 그 빈도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나를 감당할 수 없다. 양 손 가득 쥐고 있는 무언가들을 놓고 떠나버리기에는 나는 현실을 눈감아 버릴 용기가 없었다.

L.A.의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 청취자들이 전화를 해서 노래를 신청하는 심야 프로그램이 있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미국 친구가 그 프로그램에 전화를 걸었고 운 좋게 연결이 되었다.
’그런데 진짜 이름이 생선인가?’
’아니요. 진짜 이름은 김동영이에요. 생선은 내가 만든 닉네임이구요.’
’그런데 왜 하필 생선이야?’
’생선은 절대 눈을 감지 않잖아요. 그거 알아요? 생선은 눈꺼풀이 없어요.
사실 감지 못하는 게 아니고 감을 수 없는 거죠. 난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눈을 감지 않을 거거든요.’

-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거야 中

우연히 집어 든 한 권의 책. 그는 자신을 생선이라 소개했다. 눈꺼풀이 없기에, 절대 눈을 감을 수 없는 생선. 생선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눈을 감지 않겠다는 남자, 이 남자가 궁금해졌다. 그의 머릿속이, 그의 사고가 궁금해졌다. 어쩌면 이 책 한 권이라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절대 눈 감지 않고, 다만 현실이라는 족쇄의 눈은 질끈 감아버리고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몇 페이지를 읽었을까. 그의 책 속에 담긴 밥 딜런의 노래 가사에 눈길이 멈춘다.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누군가로부터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까? 
기러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건너야 모래 위에서 잠잘 수 있을까? 
나의 친구가 대답했지.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다고.

사람은 얼마나 많이 올려다보아야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귀를 갖고 있어야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을까? 
나의 친구가 대답했지.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안다고.

- 밥 딜런 ’ Blowin’ in the wind’

생선씨 글의 효과가 너무 탁월했던 탓일까. 안되겠다. 당장 어디라도 떠나야만 했다. 그 어떤 것도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다음 날 바로 인천공항으로 떠났다. 분주히 어딘가로 오가는 사람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 마치 ’내 마음이 이렇게 무겁다오’라고 말하듯 묵직하게 끌려 나가는 짐가방들, 그 속에서 생선씨의 책을 들고 앉아 이리저리 시선을 옮겼다. 한 줄 글귀를 마음에 담아 음미하면서 떠나는 사람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그런 시간이 반복되기를 몇 차례. 밤이 찾아왔다. 공항 근처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여행자가 된 것처럼, 밤새 생선씨의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아침을 맞이했다. 

마치 여행지에서 새로이 아침을 맞이한 것처럼 무거웠던 마음을 버려둔 채 공항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