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에서의 삶의 시계는 유한하다. 그렇기에 본래 한 사람과 진솔한 일대일로 깊이있게 파고드는 만남도 좋지만 어떤 때에는 짧은 시간동안 다양한 사람과 두루 갖는 만남도 나쁘지 않다. 사람의 일이 그렇듯 책을 읽으면서도 종종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짧은 시간동안 한 권의 책 속에서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순 없을까. 그런 생각에 목말라 있던 차에 만난 책이 바로 남궁산의 장서표 이야기 <인연을 새기다> 였다.

장서표라는 것에 대해 책의 주인을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책 도장이라는 얕은 지식 정도만을 알고 있던 나에게 이  책은 실로 흥미로운 책이었다. 남궁산, 화가인 그는 ’문단의 마당발’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문인들과의 다양한 안면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문인과 문학을 좋아하던 그에게 장서표를 새기는 일은 위대한 즐거움이요, 인연을 만들어 나가는 하나의 장치였다.

장서표는 문자와 이미지가 조화롭게 결합된 것이 특징으로 자신의 이름과 함께 이미지는 장서가의 직업이나 취미, 가치관 등을 압축해서  표현되기 때문에 온전히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겠지만 결국 남궁산의 장서표는 사람을 담아내는, 그 하나로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장서표를 만들면서 이어진 인연에 관해서 한겨레 신문에 연재했던 원고들을 모아서 낸 책이다. 책 속에는 다양한 인물들의 장서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젊은 여성층에게 사랑받는 작가 공지영부터 소설가 김훈, 시인 도종환, 사진가 이지누, 기자 최재봉까지 다양한 분야에 몸담고 있는 문학을 사랑하는 공통점을 지닌 이들의 형형색색의 삶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이 사람에게는 왜 이런 이미지의 장서표를 만들었을까라는 궁금증을 품고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를  읽어내려 갈 때마다 그 사람에게 너무 잘 어울는 장서표를 만들어 낸 남궁산에게 한 번, 치열하게, 그리고 열렬히 문학을 사랑해온 이들의 이야기에 한 번,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몇 번이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책장을 덮은 지금, 저자를 통해 문학계의 거장들을 한 명씩 조근조근 소개받은 기분이랄까. 마음이 든든해진다.

56명의 문인들과의 만남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어떤 이는 내가 알고 있는, 평소 즐겨 읽는 작품의 작가를 만나서 기뻤고, 또 어떤이들은 이번 만남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되면서 소위 말하는 흙 속의 진주를 찾아낸 것 같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만남의 시간은 짧았지만 마음 속 기나긴 여운을 선사해 준 그들. 남궁산은 장서표를 새기고 그에 관한 글을 쓰는 일을 하는 동안 정녕 즐거웠다고 말한다. 장서표를 새길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겨진 그의 인연들은 언제까지고 지워지지 않고 찬란하게 반짝일 것이다.

『 내 삶의 정신이 ’simple life, high thinking’ 이야. 간소한 생활 속에 높은 사유, 사상이 나올 수 있거든. 풍요 자체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물질적인 충족에 빠져버릴 위험을 경계하는 뜻이야. 물질생활은 검소하게, 정신생활은 고매하게 하자는 거지        ㅡ 리영희 』

『  저는 들국화예요. 늦깎이. 그래요. 사실 사람들마다 생애 최고의 시절이 각각 다르잖아요. 어떤 이는 20대, 어떤 사람은 30대에 맞이하지만 저에게는 아직 안 왔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국화라는 거죠. 가을에 피는 한 송이 들국화.        ㅡ한비야 』

『  도시에서 온 놈들은 겨울 들판을 보면 모두 죽어 있다고 그럴 거야. (...) 농사꾼들은 그걸 죽어 있다고 생각지 않아. 그저 쉬고 있을 뿐이라 여기는 거지. 적당한 햇빛과 온도만 주어지면 그 죽어 자빠져 있는 듯한 땅에서 온갖 식물들이 함성처럼 솟아 나온다 이 말이네.    <포도나무집 중경> 중에서 ㅡ 김영현 』